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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이면서개인적이지않은

유한한 시간, 남은 삶은 몇 년?

by 기름코 2023. 10. 3.

이것은 날씨가 환상적으로 좋은 추석 연휴에 일하다가 현타가 와서 쓰는 일기. 

# 지속가능한 일인가?  

이직한 회사는 업무량이 굉장했다. 이직하자마자 한 달 반 동안 6명의 작가를 섭외해서 원고 작업을 수정고까지 마쳤다. 신규입사자 교육, 신규 입사자 저작권 교육 등 중간중간 들어야 하는 교육들도 들어가면서.월~금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일정이라, 주말은 기본이고, 설 연휴에도 일했다. 어찌저찌 무사히 듀를 맞춰서, 7월에 무사히 마감하고 8월 1일에 프로젝트 공식 완료. 

여름 휴가 다녀와서, 다음 프로젝트 준비하는 와중에 다른 팀으로 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이전 팀보다 훨씬 비전 있는 일을 하는 팀이었다. 원래 디지털 분야로 진출하고 싶었던 마음이라 수락 의사를 그 자리에서 밝혔고, 8월말부터 자리를 옮기고 신규 업무를 시작했다. 와, 그런데 여기는 더 장난 아니다.  업무 계획을 세울 땐 연휴, 휴일 등을 감안해서 실 업무 일수를 기준으로 일정을 짜야 되는데, 여기는 주말에도 연휴에도 일하는 게 너무 당연한 것 같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스케줄을 군말없이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안 되겠는 사람은 그냥 퇴사한다. 팀장은 애가 나보다 어린데도 평일에 자정쯤 퇴근하고, 초등 애가 둘인 뒷자리 과장은 주말에도 틈틈이 일하지 않으면 마감을 못 따라간다고 조언을 해 준다. 이게 어쩌다 벌어지는 일이 아니고 일상이면 진짜 문제 있는 거 아닌가? 

내년 봄까지만 내 일상이 없다고 생각하고 무리한 일정에 다 맞춰서 나를 갈면 해결될까? 하지만 하루에 2시간 자고 일한다는 워커홀릭인 조직장 밑에서 돌아가는 조직이 내년에는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없어 보인다. 이런 조직에서는 팀장도 달고 싶지 않다. 일 욕심 많은 팀장들이 기꺼이 혹사당하는 게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기꺼이 혹사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 균형을 잃어가는 일상 

다시 또 시간에 쪼들리고, 업무 스트레스가 가중되며 간식량과 식사량이 늘고 운동 시간과 수면 시간은 부족해졌다. 그 결과 조금씩 살이 계속 오르고 있다. 입과 정신은 연결돼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입을 자꾸 움직이고 싶다. 몸이 조금씩 다시 안 좋아지는 게 느껴진다. 

내가 꿈꾸는 일상은 4시에 퇴근해서 5시부터 6시까지 운동을 하고, 6시부터 저녁을 준비해서 가족과 나누어 먹고, 10시까지 패밀리 타임을 갖고 잠드는 것이다. 주말에는 쉬고,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4시에 퇴근하는 건 불가능하고, 이 회사에서는 초근이나 주말에 일하지 않으면 평일 업무량도 다 못 해치운다. 

애엄마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한 건 나중에 자기 아이밖에 모른다는 말이 있다. 회사에 매여 동동거리는 나를 내 아이만 알지 회사가 어떻게 아는가? 

최근 읽은 <평생 써 먹는 기적의 운동 20>이란 책에서 인상적이어서 체크해 둔 문장이 있다. 

"뭔가가 재미없다면 꼭 해야 하는 정도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말자. 삶에 주어진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쓰자."  

주어진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쓰자는 말이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인생이 꼭 재미를 좇아야 하는기? 재미가 뭐지? 재미와 의미가 같이 갈 수 있나? 어떻게 살아야 할..까... 

# 그만둘까 말까 

모든 직장인이 한 번쯤은 한다는 그만둘까말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생각을 정리해 보자면, 

- 일단 내 나이, 내 연차에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건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디지털 관련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좋은 기회를 잡았다. 

- 회사 자체는 좋다. 유연근무제도 있고 구내식당도 잘 되어 있는 게 큰 장점. 그런데 미처 다 못 쓴 연차를 급여로 보상을 안 해준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아직도 연차 보상을 안 해주는 회사가? 이직자인 나조차도 겨우 11개 발생하는 연차를 올해 다 못 쓸 것 같다. 일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연차를 써? 초과근무하면 대체 휴뮤가 나오는데 그 대체휴가를 쓸 시간도 없다. 일이 많아서.  듣자 하니 팀장들은 연차를 내고 출근해서 일 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일이야...........  

- 지금 이 프로젝트를 유지하려면 시터나 조부모의 도움은 필수다. 그런데 좋은 시터를 하루에 몇 시간 고용하는 건 힘들고 (대부분 생계형 시터로, 어린아이를 긴 시간 맡기를 바라니까) 조부모의 도움도 어쩌다 받는 거지 일상적으로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 시터를 구했다 하더라도, 평일에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0에 수렴하게 된다. 한편 다르게 생각해 보면, 지금은 아이가 어려서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한 게 아쉽지만, 조금만 더 커도 아이는 또래와의 시간, 자기만의 시간을 더 원하고 부모는 아웃오브안중일 확률이 높다. 

- 6시에 퇴근해서 아이를 보고 재운 다음에 11시부터 다시 일하는 방법도 있다. 이 경우, 수면 시간이 부족해지고, 운동할 시간도 없어서 건강은 악화된다. 점심 시간 틈틈이 운동해도 수면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는 게 가장 큰 문제, 하루에 7시간은 자야하는 나인데, 7시간 수면을 못 지키고 있다. 

- 모든 걸 다 포기하고 7, 80년대 산업 역군 아빠들처럼 주말에도 아이는 애아빠에게 맡기고 나는 일만 하는 방법도 있다. 회사의 노예처럼. 

- 그럼에도 쉽게 그만둘 수 없는 건 어느 한쪽의 수입이 많지 않은 맞벌이 부부이기 때문. 외벌이만으로는 애 교육을 시키면서 저축도 하고 여행도 가고 하는 삶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든 같이 벌어야만 한다. 

- 주말부부 피로도 극심하다. 나는 경기도 서쪽 끝, 남편은 경기도 동쪽 끝에서 일하는 이 상황!  주중에 양육 부담 나에게 몰빵인 이 상황! 끝이 안 보이는 터널이 나를 힘들게 한다. 

# 대안은 있는가? 

- 가장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이지만, 시간이 없어서 시작만 해놓고 진행이 안 되는 일이 있다. 창작자로서 내가 저작권자가 되어 돈을 번다면 회사 그만두고 나는 프리로 일하면서 남편 회사 근처로 이사가는 방법이 있다. 내가 내 회사를 차려서 내가 저작권자로서 콘텐츠를 만드는 게 사실 내가 가장 해 보고 싶은 일인데, 회사 그만두기 전에 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현실적으로 실현해야 하지 않을까? 남자 여자를 바꿔서 내가 남자였어도 이렇게 회사를 그만둘까 말까 고민을 했을까? 남편 입장이었으면 어떻게든 회사를 계속 다니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을 듯. 내가 현실성이 보장되지도 않은 망상에 가까운 계획으로 회사를 그만둬서 가계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게 맞나? 

- 죽기살기로 어떻게든 내년까지 버티며 디지털 관련 경력을 쌓아서 내년에 판교에 있는 회사로 이직 및 이사를 하여 주말부부 청산하는 시나리오도 있다. 하지만 내 나이에 이직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이직한다해도 이직한 회사도 여기처럼 엄청 바쁠 것 같은데? 사기업 조직 생활이란 것이, 그리고 내 나이가 뭔가를 갈아서 성과를 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 회사 일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정말 이 세상에 편한 직장이라는 게 있긴 있나요? 

- 이런 와중에 그나마 기대를 거는 것은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반강제적으로 내가 내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되는 위기이자 기회(?)가 찾아오는 상황을 만나는 것이다. 정말 이 정도로 파격적인 계기가 찾아오지 않는 한 회사를 그만두기 즉 매달 일정 수입을 보장하는 월급과 안정적인 경력쌓기를 버리는 건 정말 큰 용기, 정말 큰 포기가 뒤따르는 것 같다. 

- 직장 그만두고 전업맘 된 선배는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직장 그만두지 말고 버티라고 했다. 그럼 그 조언에 따라 올해 말까지 어떻게든 버티다가 내년에 배째라 하고 단축근무 신청해? 하지만 이 회사는 그런 분위기의 회사가 아니다. 어린이집 다니는 애가 입원했는데도 프로젝트 마감 때문에 회사에서 야근 또 야근하는 내 옆자리 대리를 보면서 느낀다. 재채기와 기침 연속에 코를 풀며 일하는 대리. 하지만 아무도 집에 들어가서 쉬라고 말하지 못한다. 아니, 않는다.

# 의미와 재미

의미 찾다가 인생 골로 갈지도 모른다. 내가 20대에 의미 있는 일만 찾다가 인생 나락갈 뻔했기 때문에 잘 안다. 의미 찾을 시간에 어떻게든 생산적인 일을 하나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20대 중반의 뼈아픈 실패 때문인지 허송세월 하지 마라, 성과를 내라, 돈을 벌어라가 내 머릿속에 정언명령처럼 자리잡았다.

나는 생각보다 그렇게 재능이 없을 수도 있고, 평범하게 월급쟁이로 살면서 부지런히 저축하고 애 자라는 거 보면서 보람느끼는 게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자꾸만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는 어떤 '감'이 자꾸 나를 붙잡는다. 

결정과 선택에 대해 고민하다가 만난 인터뷰 기사다. 

https://biz.chosun.com/topics/kjs_interstellar/2023/09/30/IKQ3LS4JGZH6NEF5SYBCPXGCOA/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결혼할까, 말까…” 다윈도 못푼 인생 미스터리, 풀어낸 美경제학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결혼할까, 말까 다윈도 못푼 인생 미스터리, 풀어낸 美경제학자 답 없는 인생 문제는 뛰어듦이 중요 인생 중대사 결정 아닌 결심의 문제 다윈도 결정장애 결혼 증명은 결국

biz.chosun.com

 

"인생에서 때때로, 어쩌면 거의 항상(!) 명석한 분석보다는 직관에 의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키우세요. 그런 다음 A에서 B로 가는 최적의 경로를 찾으려고 하기 전에, 애초에 B가 내가 가고 싶은 곳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세요.”

“어쩌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보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항상 좋은 생각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실수란 안초비를 싫어하면서도 계속 안초비 피자를 주문하는 거죠. 벨리칙 감독은 드래프트가 과학적 절차가 아니라 주사위 던지기에 가깝다는 걸 인정했어요. 답이 없는 문제의 결과가 좋지 못하다고 해도 그게 내 실수는 아닙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에요. 결과가 나쁘면 빨리 중단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세요. 제가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는데 그곳이 싫다면 다른 곳으로 가면 됩니다. 랍비 조너선 색스가 그랬지요. “결혼을 이해할 유일한 방법은 직접 해보는 수 밖에 없다”고. 인생이 다 지나가는 것을 피할 유일한 방법은 ‘실수에 대한 걱정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 바라는 일상 

- 이번 같은 황금 연휴에도 일 걱정을 하고, 미처 다 못 한 일 때문에 쩔쩔 매고 싶지 않다. 미세먼지 없는 청정한 가을 햇살을 누리지 못하고, 노트북을 보면서 한숨 쉬고 싶지 않아. 

- 6시에 일어나서 간단한 스트레칭, 독서 및 개인 시간 갖기. 아이 쪼지 않고 여유 있게 등교 시키고, 재택으로 본격 업무 바로 시작. 4시 칼퇴근. 5시까지 운동. 5시부터 집 청소 및 저녁 준비. 7시에 아이 저녁 먹이고, 숙제 봐주고 함께 놀기. 10시에 취침. 이렇게 하루 7-8시간은 맘편히 푹 자는 삶은 정녕 평생 이룰 수 없을까? 

-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아이와 평일에도 여유 있게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걸까? 

- 재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온전히 내 시간을 내가 통제하고 누릴 수 있는 일은? 내 일의 고용주가 내가 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당분간 수입이 0으로 줄어도, 앞으로 내가 받던 예전 수입을 보장할 수 없어도, 괜찮을까? 무모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