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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박총's 일상 영성 앤솔로지 5강

by 기름코 2014. 4. 13.

사랑과 성의 영성 - 연애와 섹스는 영성의 친구다

 

 

사랑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해 이 사회와 교회에 만연한 사랑에 대한 오해들부터 깨부수겠다.

 

<사랑에 대한 오해들>  

 

1. 첫번째는 사랑은 감정이라는 오해다.

 

감정은 사랑의 부분임에도 사랑=감정으로 되어있는게 문제다.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사랑에 빠지는 감정 즉, 열정은 그 기간이 18개월 정도로 매우 짧다. 그렇다면 그 열정의 감정이 사라지게 되면 사랑이 끝난 것인가?

 

나는 진정한 사랑은 2-3년의 열정의 유효기간이 끝난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 이후의 진정한 사랑이 드라마에 덜 언급되고, 덜 알려져 있는 이유는 그런 사랑을 해본 이들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신앙과 사랑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3요소는 지, 정(느낌), 의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는 신앙은 지, 정, 의 차례를 거치는데 사랑은 정이 먼저 온다는 것이다. 

사랑은 그 후에 정에서 지, 지에서 의로 가게 되는데, 나는 이 지점부터 진짜 사랑이 시작된다고 본다. 의로 가게 된 사랑은 종국엔 다시 정으로 돌아오는데, 이 때의 정은 지와 의에 기반해있는 것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쳐, 지, 정, 의를 다 갖춰야만 건강한 사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아내와 곧등학교 때부터 연애했고, 애 넷을 낳았으며 벌써 25년째 살고 있다. 연애같은 설렘이 있겠는가? 당연히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지, 정, 의를 모두 갖춘 건강한 사랑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아내가 예쁘다.

 

 

2. 두번째는 많이 좋아하는 것만으로 사랑이 이뤄진다는 환상이다.

 

진학이나 승진을 위해서는 그렇게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사랑은 대가없이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사랑엔 많은 공부와 대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변기 뚜껑을 올리지 않는 남자 때문에 몇 번이나 이혼한 미국의 여배우도 있다. 나는 그래서 과감히 결혼 생활을 하면서 앉아서 소변을  보기로 했다. 아들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내가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되면서 남자들이 좌변기에서 서서 일보는 것이 타인을 번거롭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즘 선진국은 위생상 앉아서 소변 보는 교육을 하고 있다.

 

책 <다섯가지 사랑의 언어>를 보면, 사람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 어린 시절, 환경, 타고난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을 이루려면 그 사람에 맞는 언어를 공부해야 한다. 저자는 다섯가지로 정리해서 소개하고 있다.

 

1) 인정하는 말 - 칭찬 등

2) 함께 하는 시간 - 옆에 조용히 앉아있어 주는 것 만으로도

3) 상대 위한 봉사

4) 스킨십

5) 선물

 

책 <밀월일기>에도 썻듯이 나의 경우엔 4) 인데 아내는 3)이었다. 그래서 신혼 땐 많이 부딪혔다. 그러나 아내의 사랑의 언어가 봉사임을 발견한 후엔, 아내에게 더이상 나의 언어를 강요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아내의 언어로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내를 위해 청소를 하고, 요리를 했다.

 

이처럼 사랑엔 상대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3. 세번째는 사랑이 일상을 벗어나는 것, 비일상적인 낭만적 로맨스라는 오해다.

 

단테라는 사람을 예로 들겠다. 단테가 십대일 때 베아트리체를 보고 한 눈에 반했다. 평생 그 여자는 딱 두 번 봤을 뿐인데도, 딴 여자랑 결혼하고 살면서도 평생 잊지 못했다. 현실의 아내는 작품과 그의 인생에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베아트리체는 계속 등장한다. 아내는 가정부나 유모에 불과, 딱 두 번 본 환상의 여인에만 잡혀 살았다. 사랑은 비일상이어야 한다는 착각이 낳은 사태다.

 

단테처럼 사랑을 이상화하지 말자. 성과 속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신앙관과 다를 게 없다. 팍팍한 일상에서 꽃피는 게 진짜 사랑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꾸만 반대로 가르친다. 화려하고 좋은 레스토랑, 멋진 여행, 여유가 있고 멋진 외양의 사람들 속에서만 사랑이 존재한다고.

 

4. 네번째는 성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라는 관점이다.

 

성관계를 가질 수 없는 커플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인가? 아니다. 따라서 성이 없는 사랑도 존재함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섹스가 있어야만 그 관계가 진짜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려라.

 

이러한 일반인에 입각한 사랑에 관한 오류는 우리의 구원관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흔히 구원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때라고 한다. 지에 기반한 구원관이다. 그러면 지체 장애인은 어쩌란 말인가? 지체장애인은 지에 입각한 구원관으로 보면 구원이 불가능하다.  기존의 구원관은 비장애인, 기본 지능을 전제로 한 제한적 구원관임을 알 수 있다.

 

성 얘기가 나온 김에 성욕에 대한 신학적 관점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기존의 기독교는 성욕을 죄악시했다. 그러나 어떻게 성욕이 죄악일 수 있겠는가? 오히려 성욕을 품지 않는 자가 이상한 것이다. 성경에 언급된 시각 간음죄 때문에 오해가 많은 것인데, 섹시한 여자를 보면 자극이 오는 것 자체는 절대로 죄가 아니다.

 

한 신학자의 말을 인용하겠다.

"새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새가 내 머리 위에 둥지를 짓지 않게 할 수는 있다."

이것이 정답이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 화내는 것도 죄 아니다. 성경의 말씀은 붙들고 있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니,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을 정죄하지 말자.

 

교회는 짧은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를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젊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음욕을 품게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이 인간의 신체에 주신 아름다움이라는 프레임으로 바꿔 생각해야 한다. 관능미 자체는 정죄 대상이 아니다. 나는 관능미 안에서도 하나님을 본다. 관능미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은 감각의 하나님 아니던가. 피조 세계의 감각의 즐거움, 감각으로 충만한 노출의 계절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감각과 성욕이 없었을까?

나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도 품었던 그것이 어떻게 죄인가.

 

 

5. 다섯번째는 돈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오해다.

이것은 지난 2강 때 자족의 영성과 일치하기 때문에 패스.

 

6. 여섯번째 문제는 왜곡된 가정상이다.

 

한국 교회의 가정 사역,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같은 것들은 모두 미국 남부의 보수적 백인 중산층의 가정상을 그대로 가져온 것에 불과하다. 사회적으로는 보수주의에 이기적인 가족중심주의, 성공 지향주의를 답습하고 있다.  

 

나는 이와 반대의 가정 사역을 하신 양혜원의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를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교회 사모인데, 목회자 부부의 전형적인 상을 깨버렸다. 둘은 청년들 앞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모두 노출한다. 보통 목회자들은 연기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 부부는 반대로 그대로  보인 것이다. 아내는 남편의 말에 순종하고 고분고분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교회 사람들에게 이들 부부의 모습은 생경한 것이었다. 교회 청년들이 실망하고 떠나기까지 했지만, 부부가 완벽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반목하고 갈등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 것에 아쉬움이 전혀 없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내가 볼 때 우리나라 교회가 추구하는 가정상은  가부장적이고, 체제 순응적, 소비지향적이며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이다.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남편, 순종적이고 살림과 육아에 전념하는 아내, 고분고분하고 공부 잘하는 자녀들로 구성된 전형적인 기독교 가정의 모습. 여기에 더해 가족의 행복을 최고로 치는 가족 이기주의, 국가의 변혁을 부르짖는 자들에게는 정색하는 부모와 그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는 자녀, 부모 자식간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는 무균질 행복이 깃든 가정.

 

이것이 한국 교회가 지지하는 가정 모델이다. 이 가정상은 교회를 압도적으로 지배해왔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반대한다 . 내가 지지하는 가정상은 다음과 같다.

 

성역할에 있어서는 탈가부장적, 사회정치적으로는 진보적, 문화적으로는 자유주의, 생태적 감수성에 대해서는 민감, 경제적으로는 자발적 가난을 추구하는 가정. 남녀의 역할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갈등과 다툼을 자연스레 드러내고, 불의에 맞서 온 가족이 함께 싸우고 기도하는 가정이야 말로 천국이 깃든 홈 스윗 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를 보여주는 이상적인 가정이 문익환 목사의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문익환 평전에 묘사된 문익환 목사의 가정은 다음과 같다.  

 

'한 지붕안에서 공존의 훈련을 거듭한 끝에 순전히 토의와 자율로 운영되는 결사체.'

 

성별, 나이를 초월하여 온 가족이 둘러앉아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런 문 목사의 가정이 한국 근현대사에 어떤 역할을 담당해왔는지를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명문가는 바로 이런 가정을 두고 해야하는 말이다. 재벌은 명문가가 아니다. 자신들의 영달에만 몰두하는 작자들은 권세가일지언정 명문가는 아니다. 나도 우리 집 네 아이들과 밥상에 둘러앉아 인생과 사랑을 논하며, 쇠가 서로를 벼리듯이 서로를 빛나게 해줄 수 있길 소망한다. 

 

어떠한 가정상을 소망하느냐는 굉장히 다른 그림을 그려내게 하는데,

잘못된 가정상에 의한 많은 문제가 아직도 한국 교회와 이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가사 시간. 한국 남자들이 하루 평균 32분만 가사 노동에 참여한다. 이것은 부부의 직장 생활 여부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여가시간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 50분 더 자기만을 위한 여가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반면 독일 남자들을 가사 노동 시간을 똑같이 분담하고 자신의 잠을 줄여서, 자기 시간을 확보한다.

 

나는 이런 남성분들에게 내가 쓴 주부 복음서를 들려드리고자 한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성경을 읽고 이해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가사를 거들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것도 주부의 시각으로 복음서를 보기 때문이다.  식용유 좀 사달라는 아내를 위해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님처럼 물을 식용유로는 못 바꿔도 얼른 가게로 뛰어갈 수는 있는 것 아닌가. 아내가 목 말라하면 주님처럼 영원히 샘솟는 샘물을 만들어주진 못해도 냉수라도 한 잔 떠다줄 수 있는 것이고, 집에서 쉬는 날이면 주님처럼 채찍을 들고 성전 주위를 돌지는 못해도, 빗자루를 들고 청소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내가 돈을 좀 많이 썼으면 주님이 향유 부은 여인에게 하셨던 것처럼 거룩한 낭비라고 하며 심하게 나무라지는 말고, 아내가 나를 세 번 실망시키면 베르로한테 세 번 배신당하고도 양을 통째로 먹인 예수님처럼은 못해도 애들 밥이나 잘 먹이라는 정도에서 그치고, 가사 일에 지친 아내에게 주님이 제자들에게 했듯이 한적한 곳에 여행은 못보내줘도 저녁 한 끼는 쉬게 해줄 수 있다. 가족과의 시간에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지키신 예수님처럼 거창한 것은 못해도 적어도 사흘 후에 애들과 놀아주겠다고 한 약속만큼은 지켜라."

 

"끝으로 다른 것은 예수님 흉내라도 내라고 했지만, 이것만은 예수님과 똑같이 해야한다. 아내를 일생의 반려자로서 선택했으면 예수님이 선택한 자들을 끝까지 사랑했듯이 하늘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평생 사랑하며 살아라."

 

7. 일곱번째 큰 착각은 배우자를 하나님이 골라준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배우자를 정해줬다고?? 아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다. 배우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더라도, 최종 결정은 본인이 한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하는 하나님이 정하신 짝이 어딘가에 있다, 배우자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라는 강의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심지어 교회는 바울의 명령인 "자기 뜻대로 결혼하되, 주안에서"를 인용하여, 믿는 자들끼리의 결혼을 권하고, 그렇지 않으면 정죄하기도 한다. 옛날에 나도 누나들 결혼할 때 비크리스찬과 결혼한 누나를 정죄하고 그랬다. 그러나 비크리스찬과 결혼하는 것 정죄할 일 아니다. 인간의 차원으로는 신의 뜻을 온전히 이해 못하는 것이다. 그런 결혼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당연히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작은 틀 안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 3차원의 존재가 6차원, 10차원 이상의 존재를 어떻게 온전히 이해하는가.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그 단순한 말씀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과 실제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뜻대로 결혼하되, 주안에서" 도 우리가 함부로 가져다가 정죄의 도구로 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거기에 맞게.

우리가 평생의 소울메이트를 만나서 결혼하든 그렇지 못했든,

내 진짜 재능과 적성을 살린 직업을 택할 수 있었든 없었든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궁극의 최선과 절정을 평생 동안 만나지 못하거나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인생의 과정 안에는 신의 은총은 존재한다.

 

이혼한 가정, 이혼으로 재혼한 가정에도 하나님의 은총은 존재한다. 심지어 불륜으로 이혼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있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다윗과 밧세바의 사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둘은 행복하게 해로한다. 죄의 댓가는 분명히 받았다. 그러나 그 후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인간의 생각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내가 이성 교제 강의만 20년을 했는데, 18년째에도 이런 얘기 안했다가 최근엔 이 말을 한다. 비슷한 사람과 결혼하면 편하긴 하단 것이다.  살아보니까 비슷한 사람이랑도 결혼해도 너무 힘들 때가 있다. 여기서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은 속물적 기준으로 즉 경제, 학력 이런 것 보라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지향성, 가치관 이런 것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사실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을 극복하기까지는 참 험난하기 때문에.

 

8. 여덟번째, 서약의 중요성이 사라진 사랑의 문제다.

 

결혼할 때 예식장, 예물 이런 것은 그렇게 많이 신경쓰면서 서약에 대해선 깊게생각해보지도 않는다.  남이 읽어주는 서약을 대강대강 형식만 치루다가 결혼식이 끝난다. 이거 상당히 잘못된 관행이다. 결혼의 꽃은 서약이며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엄숙한 서약이 있기 때문에 결혼식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서약은 자신들이 작성해야 한다. 종교적 서약 다음으로 결혼 서약이 중요하다. 자신이 한 서약을 일생에 거쳐 지켜나가는 것인데 왜 남이 쓴 서약을 사용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서약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다들 비슷하다. 그러나 진부하고 뻔한 클리셰가 진심어린 나의 언어가 될 때 그 내용은 진정성을 갖는다. 평생 두 사람을 지키는 힘이 된다. 뻔하고 보편적인 기도문이 온전히 나의 기도가 될 때 신앙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 서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서약이 사랑을 지키는 것이라고.

 

9. 아홉번째, 교회에서 비혼을 다루는 문제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교회는 비혼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왜 자꾸 교회는 결혼을 강요하는 것인가.

교회에서 자꾸 결혼의 가치, 결혼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타임지가 선정한 21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스탠니 하우워스가 뭐랬는 줄 아는가. 원래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독신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독신인 사람한테 교회가 왜 결혼 안하냐고 묻는 것은 이상한 거다. 그것은 세상의 질문이다. 교회적인 질문이 아니다. 교회는 방향이 바뀐 질문을 던져야 맞는 거다. 결혼한 사람들에게 왜 당신들은 결혼을 하게 되었냐고 물어야 한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가 원래의 모습이고, 오히려 결혼을 한 게 질문받아야 할 일이다. 비혼자들은 존중을 받아야 하고, 기혼자들이 대답해야 한다.

 

10. 열번째, 사랑은 속된 것이라는 고정관념.

 

성경을 보면 다윗이 다말을 두고 연적들과 겨뤘던 일화부터 시작해서 다들 사랑에 목숨 거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야곱과 그의 아내들의 적나라한 모습도 다 나온다. 속되게 천박한 모습들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다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이란 존재가 사랑을 갈구하고 향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