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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박총's 일상 영성 앤솔로지 4강

by 기름코 2014. 3. 30.

저항과 투쟁의 영성 - 날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

 

크리스찬은 저항과 투쟁의 영성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이것은 나 개인의 과격한 주장이 아니라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1.

 

대부분의 크리스찬은 신에 대해 균형되지 못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랑의 하나님만이 전부인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정의와 분노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보자.

탕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두 손을 보면, 한 손은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손, 나머지 한쪽은 투박하고 거친 손이다. 부드럽게 감싸안는 사랑의 하나님과,  불의에 분노하는 하나님이 모두 하나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세상에 의문을 갖는 것, 분노하는 것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회 비판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에 합당하다.

여기서 말하는 분노란 죄로 변질된 분노,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다. 그러한 분노는 정당하지 않다.

 

 

다음은 지오토의 <성전을 정화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나를 삼켰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으니까 사회의 불의에 분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주먹을 불끈 쥐고 상대를 가열차게 노려보는 예수의 모습을 낯설 것이다.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예수의 모습을 우리는 부정해왔다. 그러나 예수의 또 다른 얼굴도 반드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이런 주의 모습을 보고도,

길에서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들의 시위를 보고 눈을 찌푸릴 수 있을까?

과격하다고 손가락질만 할 일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리스도인은 그래선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은 손가락질 할 때도 저들은 왜 저렇게 분을 품게 되었을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의 사랑과 분노의 두 얼굴을 모두 품어야 한다. 백인의 형상으로 힘없이 마른 손으로 기도만 하는 잘생기고 온화한 얼굴의 예수가 아니라 검은 피부에, 비루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못생긴 노동자 예수, 길에서 소리치며 분노로 일그러진 격한 얼굴의 예수를 기억해야 한다. 

 

시편 7장을 보자.

날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이 나온다. 공의에 근거한 의분을 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다. 사랑한다면서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진심으로 이 세상과 인류를 사랑한다면, 분노는 당연한 것이다.

 

 

2.

 

책 <분노하라>에 나온 내용을 말씀 드리고 싶다.

저자는 저항하라, 참여하라, 공감하라고 일갈하고 있다. 분노할 것에 분노할 때 역사에 동참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된다면서, 최악은 무관심이며, 일반화 된 망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노동 운동계의 대모인 도로시 데이는 20세기 초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인텔리 여성이다. 그녀는 감리교 집안의 평화를 '인상적'이었다고 표현하며, 세상의 고통에 눈 감은 그들만의 행복은 고통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본인은 여성으로서 그 시대에 대학 교육까지 마칠 수 있었지만, 자기 또래의 다른 소녀들은 단 하루도 또 다른 삶을 꿈꿀 수도 없이 살아가야만 하고, 한번 고정된 사회 계층은 절대로 뒤집히지 않는 현실에 대해 고민했다. 

 

신앙인이라면, 이들과 같은 의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생 신앙 생활 해왔다고 하면서, 이런 의문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  

 

조지 오웰이 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 임신한 여자 노동자가 갱도를 기어야만 생산되는 석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중산층들은 계속 그 석탄을 사용할 것이다. 뻔히 알면서도. 그들 덕에 살면서도 그들을 망각한다. 중산층의 고상한 생활은 땅 속에서 미천하게 살고있는 이들에게 빚진 삶임에도 그들은 빚진 마음을 갖긴 커녕, 노동 계급을 무시하고 혐오한다. 노동 계급을 자신들과 다르게 분류하고 천하단 인식을 주입당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아직도 갖고 있다." 

 

조지 오웰이 묘사한 이 세태는 정확하다. 우리 모두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굳이 근로자라는 말로 바꾸길 원하고, 노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노동자는 천하지 않다. 기독교는 철저히 현실에 천착하는 종교이며, 따라서 노동 역시 그 무엇보다도 기독교적이며 신성한 것이다.

 

 

현재 우리의 과제는 노동에 의존하면서도 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학습된 정서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 발걸음은 노동자들이 길에 나와 시위할 때 그들이 왜 그렇게 과격할 수밖에 없었는지 작은 의문 하나 품어보는 것부터 시작될 수 있다.

 

 

3.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해지길 원한다.

그렇다면 경건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경건해지려면 우리는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의 주장은 성경에 근거한다. 성경을 보면,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라는 율법이 나온다. 여기서 돌아보라는 것은 단순한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품으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가난한 이웃을 불쌍히 여겨 나의 저녁 밥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돌봤다고 해서 그것을 경건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찬들이 열심히 하는 봉사활동이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온정일 뿐이다.

 

경건이란 경제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약자의 근원적인 원인에 의분을 품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불의한 부의 분배에 질문해야 한다. 즉, 진정으로 경건해지려면 정치적이어야 한다.

 

심지어 성경엔 사회 구조를 바꾸라는 명령도 나온다. 과거의 십일조가 지금의 부유세다. 소득의 십의 일을 거두어 모두 사회 공의에 부가 골고루 배분되도록 한 것이다. 안식년과 희년도 보라. 특히 희년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부자거나 빈자거나 희년이 지나면 처음 가나안 땅에 모두가 빈털털이로 동등하게 들어왔을 때로 돌아가게 하셨다. 빚은 다 탕감되고, 불균형하게 배분된 땅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성경에는 가난한 자를 어떻게 구제해야 하는지 대해서도 설명한다. 하나님은 추수 때 곡식의 일부는 따지 말고, 땅 위에 떨어진 곡식은 줍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손으로 노동하여 남겨진 곡식들을 가져갈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은 동정으로 이루어지는 구제법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는 율법이었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노숙자들이 스스로 노동하여 생활비를 벌게 하는 잡지 '빅이슈'와 같은 것이다.

 

 

4.

 

나는 기독교인이라면 동선을 바꿔야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도시 구조는 시민들을 경제적 계층으로 분류하고 그들의 생활권이 결코 겹치지 않게 한다. 즉, 부자와 빈자의 동선이 겹치지 않는 이중 도시다.

 

기독인은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야 한다. 그들은 우리와 생활 동선이 겹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일부러 찾지 않으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내 생활 속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독인은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연대하고 교제해야 한다.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은 대한민국에서 세모녀 자살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가 왜인지 생각해보라.

 

크리스찬이 왜 동선을 바꾸어야 하는지, 카톨릭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는 에드위나 게이틀리가 쓴 <따뜻하고 촉촉하고 짭쪼롬한 하느님> 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게이틀리는 집과 성당만 왕복하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왔다. 어느 날 그녀는 생전 보지도 못했던 음산한 골목길을 발견한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그곳을  무언가 신비로운 음성에 이끌려 발을 디디게 되는데, 가난한 노동자들이 방문하는 술집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그 곳에서 만난 한 여인이 오늘 훔쳐온 빵을 함께 먹자고 하며 참치캔과 술도 내민다. 함께 먹으면서 대화를 나눠보니, 알고보니 그곳은 그냥 술집이 아니라 블루칼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창녀촌이었다. 게이틀리는 그녀에게 자신은 성당에서 일하는 수녀라고 말하자, 갑자기 그녀가 눈물을 쏟아내며 자신의 모든 인생을 털어놓고 고해사를 하기 시작했다. 둘은 그렇게 눈물 젖은 저녁 식탁을 나눈다.

 

얌전히 교회 안에서만 살아왔던 게이틀리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 창녀와 함께 먹었던 따뜻한 빵과 촉촉한 참치와 달콤했던 포도주가 주님이 마련하신 성찬이었음을. 사회의 가장 낮은 자인 창녀와의 식사 한 끼가 가장 성스러운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우리가 만약 게이틀리처럼 우리 삶의 동선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그러한 성찬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경험이 있다. 우울증이 발병하기 이전에는 수유리에서는 잠만 자고 밖으로 강연이나 활동을 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가난한 동네에 살긴 살지만 그 공동체에는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울증 이후에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그 안에 머물게 되면서 나의 생활이 그 곳에 자연히 속하게 되었고 가난한 이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와 그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5.

 

우리가 사회 약자를 핍박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다.

 

나에게 큰 영향을 준 몇몇의 손꼽히는 신학자들이 있는데, 그 중 한분이 히스패닉인으로서 복음주의 해방신학을 하신 올랜드라는 분이다. 그 분은 낮은 자들과 연대할 때 비로서 참된 예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크리스찬들이 열심히 하는 예배, 봉사활동, 복음 등이 의미를 가지려면 이러한 연대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 크리스찬들을 봉사 활동 참 열심히 한다. 예배도 안 빠진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그들이 왜 그렇게 가난한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도 않고, 그런 의문을 던져야만 하는 정치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면 외면해버린다.

 

그런 크리스찬은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삶이라고 볼 수 없다.

 

 

6.

 

그리스도인의 핵심이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라는 아는가? 사랑 자체가 정치적이인 것이다. 진정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이 속한 사회와 세상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르고자 하는 자라면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반드시 사회 정의에 투신해야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죽고, 진정 사랑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예수님이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복음의 역설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폴 발레리가 말했듯이 사랑이 없는 삶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진정 사랑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그 사회를 진정 사랑하셨기 때문에 체제를 비판하고 체제를 거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체제를 거스른 죄로 잡혀 죽은 것 아닌가. 

 

참된 사랑은 억압과 문제의 원인인 기존 체제를 거스르게 된다. 예수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로맨틱한 사랑, 낭만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연대의 사랑이다. 가난한 사람들, 약자에 대한 사랑은 그들과 진정 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을 계속 재생산하고 그들의 값싼 노동으로 유지되는 체제에 자신이 죽임을 당할 정도로 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기독교의 사랑이란 예수님의 사랑 아니다. 어정쩡한 수준에 그칠 뿐이다.

 

 

7.

 

그리스도인은 복음으로 산다. 그런데 그 복음은 사회 정의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자꾸 이 사실을 무시하려고 하지만, 사회 정치적 맥락을 다 빼고 성경을 해석하면 안 된다.

 

누가복음 4장 18절을 보자.

 

복음은 가장 먼저 가난한 자에게, 그 다음으로는 정치 포로범들에게, 그 다음엔 장애자에게 그리고 다른 피억업자들에게 전해진다고 나와있다. 사회의 가장 낮은 자들로 분류되고 고통받던 그들이  성경에서는 제1의 우선순위자들이다.

 

누가복음 1장 46절부터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를 보자.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 있다 말할 것이다."

 

사무엘상 2장 8절도 보자.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이들의 내용은 혁명과 같은 것이다.

생각해보라. 희년 선포도 세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거름더미란 무엇인가? 똥더미다. 그 시대에 똥더미는 모두 모아 성문 밖에 버렸는데, 그곳이 바로 골고다이다. 인분에서 나오는 악취에도 불구하고 메탄가스로 인해 한 겨울에도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살만하여 인분 근처에는 문둔병자들, 가난한 자 등 사회 취약 계층이 모여 살았다. 거기서 태어난 자들을 사회 권력자들과 같은 자리에 앉히신다는 것, 비루한 말똥 곁에서 태어나 성문 밖 골고다에서 예수가 죽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복음이란 것이 곧 사회 정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8.

 

크리스찬은 의로운 삶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나는 묻고 싶다. 의로운 삶을 추구한다면서 어떻게 사회에 관심이 없는지 말이다.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자살은 더 증가하고 법인세와 부유세, 종부세는 오히려 삭감하는 한국이니 말 다했다. 

 

지금 우리나라 광고를 보면, 신자유주의가 강화된 이후로 고리대금업이나 마찬가지인 대부업 광고가 급증했고, 제대로 된 밥을 먹는 사람보다 무수히 늘어난 편의점의 삼각김밥이 보여주듯이 밥 먹는 일조차 시간이든 금전적인 면이든 빠듯해진 사람들도 증가했다.

 

시사 만화 균형 편을 보라. 그것이 현실이다. 

 

크리스찬들이 정말로 의롭게 살고 싶다면, 이러한 현실에 눈을 감으면 안 된다. 의롭게 살고 싶다면, 봉사활동이나 열심히 하며 이들을 구제하지 말고, 구조를 건드려라.

 

엔티 라이트(톰 라이트, Nicholas Thomas Wright) 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회 변방에 속한 두 여인의 사적 만남에서 드러난다고.

즉, 작은 사람들의 작은 연대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교회는 연대는 커녕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구조를 건드리긴 무서우니까 그것은 외면해버리고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봉사를 강조한다. 심지어 어떤 이가 그 제도와 체제에 손대려고 하면 손가락질 하고 빨갱이라 정의하는 게 현재의 주류 한국 교회다.

 

그러나 봉사와 구제는 기존 체제를 공고히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시대와 이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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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면 되는지에 대해 말해보겠다.

 

첫번째, 표현하자!

 

작은 표현 하나도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나는 반전 뱃지를 늘 가방에 달고 다닌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평화적인 방법보다 무력으로 관철했던 콘돌리자 라이스에게 한 명문대학이 명예 박사학위를 주려하자 그 학교의 교수진들이 not in my name 피켓을 들고 참여했었다. 우리나라 연대생들이 모교가 한 그릇된 정치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려하자 신문광고에 반대 광고를 낸 것도 한 예다.

 

두번째, 말 걸자!

 

밥 먹을 데도 없이 계단 한 구석에 쪼그려앉아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는 청소 노동자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힘들고 궂은 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말 한번 섞어보진 못한 크리스찬들이 많다.

 

세번째, 직접 참여하자!

 

작게는 투표에서 크게는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마 대부분이 투표에서 참여의 정치를 실현할텐데, 여러분께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후보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보다는 좀 낫겠지 하면서 아무 생각없이 표를 던지지 말라는 것이다. 정책을 보고 제대로 뽑아라.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훌륭한가? 우리나라 정치 역사가 증명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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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가 옳고 보수가 그르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다. 원래 정치는 어지럽고 더러운 것이다. 젊은이들은 정치를 더럽다고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 원래 더러운 것이다. 낙관에서 시작해 절망으로 끝나지 말고, 원래 더럽다는 인정과 절망에서 시작해 낙관으로 정치를 계속 주시해야 한다. 이상적인 정치란 사실 앞으로도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치적 성향은 다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같은 보수적인 교회 안이라도 다 조금씩은 다를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 전쟁을 겪으며 인공군에게 온가족이 몰살당한 분들은 당연히 빨갱이, 빨갱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러한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된 것은 이해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사람마다 환경, 경험, 본성이 다르기에 정치적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는 과연 정치적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인가?

언제부터 반공사상과 친자본주의가 하나님의 뜻과 동의어가 되었는가?

 

폴리크에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떤 정치인의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왕당파다." 라는 말에 반박하며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다. 기독인은 자본주의를 거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나의 개인적 견해이지 하나님의 뜻인지는 모른다." 고

고백했다.

 

나는 이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보수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성경적이지 않은 것처럼 진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맹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안에서도 의견은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동적 조합이다. 근데 현재 우리나라 교회는 조합과 균형은 없고 오직 한쪽으로 치우친 보수와 반공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진보 정치가 전혀 성장하질 못했다. 리영희 대기자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빨갱이와 비빨갱이로 구분되는 분단 이념에 여전히 지배받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사상의 다양성을 더욱더 저해시키는 데에 공헌했다.

 

이러한 문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보 정당이 더 지지받는 것이 균형과 다양성 측면에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적으로는 꼴통보수일정도로 보수 복음주의자인데도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자인 신학자와 목사가 외국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신앙에서는 온건보수이면서도 약자와 소외계층을 위해서는 기꺼이 좌파를 택하며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기업을 비난하며 제도 개선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 우리도 그러한 신앙인이 필요하다. 존 스튜어트 밀도 양심적 병역 거부자이지 않았는가.

 

칼 바르트라는 아주 유명한 신학자가 있다.

그 분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사회주의자, 참된 사회주의라면 결국엔 참된 기독교."

 

나는 여러분께 또한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라는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로메로 주교의 책 <사랑의 폭력> 에 나온 말로 강의를 마치겠다.

 

"사회에, 사람들에게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실은 복음은 용감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모든 폭력의 근원은 극심한 빈부 격차다. 교회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안에서 실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