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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박총's 일상 영성 앤솔로지 3강

by 기름코 2014. 3. 22.

생태적 회심과 초록 영성 - 생태적이지 않으면 참된 복음이 아니다

 

 

 

아들이 어느 날 이렇게 물었다.

"아빠, 심해의 물고기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데 왜 존재해?"

 

이처럼 심해에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생물의 존재 의미가 무어냐고 묻는 것은 인간 중심 신학의 생태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자연이 인간이 쓰기 위해 존재하고 창조되었다는 그릇된 착각이 기독교에 만연해 있다. 생태계의 종다양성은 우리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연에 대해 인간중식적으로 사고하고, 지금처럼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또 하나의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해야한다. 순종하지 않는 것보다 왜곡되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쁜 것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생태적 삶은 나의 개인적 주장이 아니라 말씀에 명시되어있는 것임을 이번 시간에 밝히고자 한다.

 

기독교 환경 교육가, 린 와이트(화이트)는 '생태적 위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창세기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자연 이용에 있어 왜곡된 정당성이 부여되어 왔다고 말이다.

 

문제의 근원인 창세기 1장 28절을 보자.

 

"번성하고 많아져서 그 땅에 충만하고 그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기는 모든 짐승을 다스려라."

 

이 말씀에서 '정복' 과 '다스리다'는 왜곡된 해석이다. 여기에 더해 자연을 문명과 대척점에 선 야만으로 여겼던 서양인의 자연관이 결합하여, 무분별한 환경 개발이 이루어졌다. 또한 성경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20세기 초 제국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에 이용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돌보다의 히브리 원어는 '라다'로서 돌보고 가꾸다라는 뜻이다. 정복하라는 것은 번역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또한 다스리다 역시 돌보고 가꾸다이지, 제국주의적 다스림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을 해석하고 번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잘못된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모든 주어가 남성, he로 점철되어진 특정 번역판 성경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어디 이뿐인가? 정치적이고 공의적 개념인 justice를 탈정치적이며 개인적인 righteous 로 그릇되게 바꾸어놓은 것도 문제다.

 

다시 돌아와, 자연에 대한 왜곡된 해석들의 배경에는 기독교의 역사와 계몽주의 철학 사조의 등장이 있다. 기독교 공인 전에는 이 땅은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신앙관이 지배적이었으나, 공인 이후에는 기독교가 지배자의 종교로 변했다. 그 시기 다음에 대두된 것은 청지기 신앙관이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투영됐다. 하지만 진정한 주인인 하나님은 부재한 불완전한 자연관이었다. 또한 이성주의와 계몽주의의 영향 때문에 자연은 인간과 분리된 객체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러한 시대를 뒤로 하고, 이제는 반려자 신앙관의 시대여야 함을 주장하고 싶다. 이것은 피조물들이 우리가 이용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와 동등한 형제자매라는 자연관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청지기와 반려자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이 필요할 것이다.

 

반려자 신앙관에 대해 좀 더 상술해보자면, 고등어를 먹어도 꽃을 꺾어도, 그냥 취하는 것과 동의를 구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영화 '라스트 모히칸' 의 사냥 장면이, 즉 생명을 살덩어리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생명으로 존중하며 취하는 정신과 태도가 오늘날 기독인의 식탁에서도 필요하다.

 

창세기 9장 말씀을 보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위와 같은 내용은 이전에 없었기에 창세기 9장은 언약의 갱신이라고 보면 된다. 동등했던 피조 세계 간에 위계가 발생한 것이 특징이고, 이때부터 인류는 공식적으로 육식을 허락받았다. 9장 이전의 시대에는 육식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으나, 인간의 현실에 따라 변화한 것이다. 천국의 모습은 피 흘리지 않는 곳이나, 현실 세계의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없었기에 새로운 언약에서는 피를 흘려 동물의 살점을 취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즉, 기독교의 생태 운동이 곧 반육식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즉, 창세기의 언약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도 맺으신 것이다. 자연은 인간과 동등한 계약의 동반자이며, 반려자임을 밝히셨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라는 말씀도 한번 보자.

 

피는 그 당시에 생명 자체를 의미했다. 따라서 피째 먹지말라는 계명은 육식을 허하되, 육식에도 정도가 있으니, 동물을 물건화시켜서 함부로 죽이고 함부로 먹지 말라는 말씀이다. 어디 이뿐인가?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 잡지 말라, 새끼를 어미 젖에 삶지 말라고도 하셨다.

 

이런 근거에 비추어 볼 때, 현재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엔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존중 없는 고기나 음식을 맛이 좋단 이유로 계속 먹는다면 이는 옳지 않은 것이다. 로컬 문화는 존중하지만, 어떤 특정 음식들 예를 들면 거위간 같은 음식은 거부하고 싶다. 생명 존중이 문화보다 더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려자의 신앙관과 함께 필요한 것은 공존의 신학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며 소유자라는 생각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공존의 신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관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바로 인간은 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계몽주의 인간관과 달리 인간은 단지 이성적 측면에서만 자율적일 수 있을 뿐,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동료 피조물에 대한 의존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 인간은 필연적으로 생태계에 의존해 남의 살 빌어 살아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교만을 버리고 피조 세계에 겸손해야 한다. 나무 앞에 서서 네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갖는 게 생태 신학의 출발점이다.

 

역대하 36장 21절 말씀을 보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70년을 지냈으니"

 

무서운 말씀이다. 보다 못한 하나님이 무려 70년이나 인간이 땅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다. 땅이 70년 동안 밀린 안식일을 누리는 시기다. 인간에 의해 70년 동안 단 한번의 쉼도 없이 혹사당한 자연을 위한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과연 땅만 쉬지 못했을까? 땅에 대한 착취는 노동에 대한 착취였을 것이고, 노동자 역시 쉬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은, 자연에 대한 착취는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패러다임과 대상만 다를 뿐 동일한 것이다.

 

로마서 8장 19절에도, 에스겔서에도, 이사야서에도 생태 신학의 관점은 계속 나온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시간상 다 소개할 수 없지만, 공통적인 한 가지 가르침은 예수님은 인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조 세계 전부를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크리스찬으로서 생태적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 말씀드려보겠다.

 

첫째, 생태적 감수성을 먼저 키우자.

 

해야할 것과 말아야 할 것으로 나누는 것이 생태적 삶이 아니다. 생태적 감수성이 먼저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라는 시구를 인용하고 싶다. 자연을 먼저 사랑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까? 채석화 시인처럼 벚꽃에, 우종용 박사처럼 나무에 말을 걸어보라. 나는 꽃과 나비에 말을 건다. 나비와 몇 시간을 스킨십하고 놀았다면 믿어지는가?

 

호칭은 상대에 대한 인식과 관계를 결정한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어보아라. 미친 게 아니라, 계속 하다보면 자연과의 의사소통이 된다. 자연과 우주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고, 남의 인생에 대리만족하는 드라마나 쇼핑에서 가짜 즐거움을 갖는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칼린 지브란의 예언자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당신이 흙을 밟고 싶어 그 위에 서는 게 아니라, 흙이 먼저 당신의 발을 만져보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걸 보고나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면, 바람이 나를 만지고 싶어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바람이 반가워지고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것도 괜찮다. 이처럼 생태적 삶은 금욕의 삶이 아니라, 자연을 누리는 삶이다.

 

문명보다는 흙을 더 가까이 해보자. 흙을 가까이할수록 인간은 겸손해진다. 우리는 흙에서 흙으로 가는 존재아닌가.

 

둘째, 비윤리적으로 생산된 생명은 먹지 말자.

 

생명을 생명 아닌 고기로만 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또한 현대의 고기 생산 시스템을 밝혀놓은 책 toxic을 보면, 육식을 적게 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싸게 대량생산된 고기를 많이 먹지 말고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생산된 고기를 적게 먹는 것이 옳다. 이미 공산품이 되어버린 고기는 단지 그 동물뿐만이 아니라, 남미와 아프리카 사람들의 눈물이며, 그들의 생명 파괴로도 이어진다. 애초에 남의 살 값인 고기값이 그렇게 싼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마인드로 제대로 정의롭게 생산된 것만을 선별하여 먹어야 한다. 

 

셋째, 편한 것, 기능적인 것에 질문을 던지자.

 

대표적 예가 원전이다. 원전이 한번 망가지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체르노빌을 통해서 그리고 후쿠시마를 통해 보았다. 그러한 사태를 지켜보면서 묵시론적 종말론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심각성을 느꼈다.

 

그리고 일회용품 쓰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나무젓가락을 쓰지 않기 위해 젓가락을 들고다니고, 비닐 쓰기 싫어서 천장바구니는 늘 상비한다. 정수기물을 마실 때도 종이컵을 쓰지 않고 손으로 받아마신다. 차는 당연히 없다. 차 한 대가 공기를 어마어마하게 오염시킨다. 되도록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자.

 

넷째, 환경을 위한 사회적, 정치적 움직임에 참여하자.

 

환경을 위해 정치적 힘을 행사해야 한다. 혹은 적어도 자신이 뽑는 후보나 정당이 환경에 대해 어떠한 정책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캐나다에 있을 때 나는 음식협동조합에서 활동했다. 조합원들이 협력하여 먹거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조합원 시장에서 돌아가며 일을 하면서 옳은 먹거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문화를 실천했다.

 

이외에도 몇 권의 책을 소개하고 싶다.

 

1. <제국과 천국>

2. <백야드가드닝이 세상을 바꾼다.>

3. <와타나베 유지의 책> - 첨가물 덩어리인 햄, 소시지, 가공식품을 소비하여 식품 공산업에 기여하고, 그리하여 망친 건강으로 의료 시장에도 기여함을 알 수 있음. 가공식품 왜 먹으면 안 되는지 알 수 있음.

4. <지구를 살리는 불가사의한 물건 7가지> - 빨랫줄, 공공도서관, 월남국수, 자전거, 콘돔, 천장선풍기, 무당벌레

5. <생태주의자, 예수> - 생태주의적 에너지 정책인 태양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