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와 축제의 영성 - 하나님 나라는 사역보다 누림이 먼저다!
향유와 축제의 삶에 대한 성경적 근거 세가지가 있다.
1. 첫번째 근거 : 전도서 7장 9절-11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1) 즐겁게 먹고 마셔라!
전도서의 핵심은 헛되고 헛되다는 결론이 아니다.
우리 인생이 짧기 때문에 다만 그렇게 표현한 것 뿐이다.
결론은 짧은 인생이기 때문에 하루하루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사는 일상이 하나님이 내린 삶의 명령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엉망으로 산다 해도, 밥 세끼 맛있게 먹으면 하루 세 번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나에겐 이것이 복음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정하셨고,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을 즐거워 하신다.
먹고 마시는 것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언급되고 있는지 알면 놀랄 것이다.
일상의 아무 것도 아닌 즐겁게 먹는 행위가 신성한 것 그 자체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온전히 즐겨야 한다.
뭘 먹고 마시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만 사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이 뭘 먹고 마시는지 모르게 하고,
감사함으로 먹고 마시는 행위를 온전히 즐길 수 없게 하는 이 시대는 그래서 악한 시대다. 이것은 뒤에 생태 영성에서 게속 이어 말하겠다.
한 일본인 작가는 한 장군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그는 늘 급하게 먹었다. 그가 천하를 재패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먹는 행위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먹는 것을 천천히 하는 자만이 천하를 가질 수 있다. "
먹고 마시는 것만 보아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2) 아름답게 꾸미고, 언제나 축제날 같은 인생을 살아라!
성경은 외모를 가꾸는 것, 멋부리는 것을 정죄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화장을 한다. 그런데 화장을 하는 것에도 그리스도인은 남다른 기준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몸가짐을 아름답게 하라고 한다. 아가서만 보아도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찬미하지 않는다. 꾸민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현대인의 과한 성형 문화, 외모 중심 문화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엔 굉장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다.
3) 사랑하는 배우자와 즐겁게 살아라!
전도서 3장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네가 사는 하루하루를 보람되게"
성경은 현세의 삶을 부정하고 죽은 이후의 삶을 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세의 삶을 매우 긍정한다. 1), 2), 3) 이 하나님이 우리 삶에 바라시는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한마디로 얘기했다.
"my life was so tough. 내 삶은 허망했다."
그 정도로 힘들었던 야곱의 삶을 붙들었던 힘은 무엇일까? 하나님과의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졌던 영적 만남? 천만의 말씀. 인간은 기억상실의 동물이다. 수련회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와도 그 약빨 겨우 일주일 간다. 이마에 말씀을 새기고 다녀도 그거 그리 영향력 없다.
정답은 사랑이다. 연애의 힘!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야곱을 버티게 했던 건 연애의 힘이었다고 하면 신령하지 않게 본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말씀으로 버텼다엔 할레루야 아멘 하면서 연애의 힘으로 버텼다고 하는 것은 왜 안되나? 나는 이것이 신령한 것이며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애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7년 동안 노예처럼 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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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자꾸만 먹고 마시는 것, 아름답게 꾸미는 것, 즐거운 관계를 형성하는 우리의 즐거운 일상을 성스러운 것과 분리하는데 이것은 틀린 것이다.
소유도 삶이다. 소유를 정죄하는 것도 옳지 않다. 애착을 가지는 물건이 있고 그 소유를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낭비는 안 된다. 쓰되, 다 쓸 것처럼만 하지 말아야 한다. 새로 나오는 신제품 다 써봐야 하는 소비는 옳지 않다.
한번 살 때 정말 좋은 물건 하나를 사서 쓰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그 물건과 나 사이에 스토리를 만들고 내 삶의 일부로 만들어라. 창조성의 근원인 에로스 관계를 물건과 형성하면 그것은 그냥 물건이 아니게 되며 6개월에 한번씩 바꿀 이유도 없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삶을 그냥 누리자. 성스러운 것과 분리하여 즐거운 일들을 정죄하지 말자. 그냥 누리는 것만으로도 거룩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이것은 부해서 누리는 것과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가진 것 없고 가난해도 향유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 돈이 있어서 향유하는 것이 아니다.
아바를 사랑한 아들이라는 책을 일부 인용하겠다.
"친구야, 네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은 네게 지상에 사는 동안 기도는 몇 번을 했니, 영혼은 몇 명이나 구제했니 라고 묻지 않으실 거야. 다만 화이따는 맛있게 먹었니? 라고 물으실 거야. 하나님은 우리가 순간의 아름다움에 살기를 원하신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영생복락 이런 게 아니다. 결혼식 같은 축제의 삶, 즐겁게 누리다 오는 삶이 현세의 우리의 삶에서 바라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 저녁에 맛있는 초콜릿케이크를 먹는 것이다. 다만 현실의 작은 조각케이크를 먹으며 천국의 온전한 한판의 맛있는 케이크를 꿈꾸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쇳소리 내며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외치며 우상 숭배하면 저주받는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돌아버리겠다. 그런 게 통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런 것이 영혼을 구제했던 최권능 목사의 사례가 실제로 교회사에 보면 나와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이제 이 시대의 구원이 아니다.
오늘 하루도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과 내가 가진 초콜릿케이크를 나누어 먹는 것, 그것이 필요한 시대다.
2. 두 번째 근거: 서신서의 바울의 말씀
디모데가 시무했던 교회에 열성 신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금식하고, 결혼도 하지 않으며 교회일에만 전념할 것을 요구했다. 먹는 것, 관계 맺는 것들을 성스러운 것과 분리하여 정죄했다.
그러나 오히려 훨씬 더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으로 주신 것들을 막지 말라고 나무랐다. 고리도전서에도 나와 있다. 땅 위의 모든 것들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우리를 즐겁게 살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교회에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보다 향우와 축제의 영성이 우선순위에서 더 앞선다.
인도의 환경운동가, 사회운동가이자 문학가인 로이에게 평생을 공공을 위해 투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선풍기 틀고 친구와 누워서 수다떠는 것, 시장에 가서 오늘은 뭘 살지 장을 보는 것, 이런 일상이 나의 힘"
동티모르의 폐허 위에서 복구 사업에 앞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던 것도 축제였다. 주민들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축제 즉,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아우슈비츠에서도 금욕적인 사람들이 제일 먼저 죽었다.
힘든 인생을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은 일상을 즐기는 것, 향유와 축제의 영성을 갖추는 것밖에 없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만을 받는 것이 아니다. 가혹한 환경에서도 향유와 축제의 영성을 지닌 자는 살아남을 수 있다.
3. 세 번째 근거: 복음서의 예수님의 삶 "먹보와 술꾼"
예수님은 파티보이다. 예수님은 먹보와 술꾼이었다. 복음서엔 어딜 가도 먹고 마셨던 예수님이 자주 묘사된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를 특정 틀 안에만 가둬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나온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던 예수님의 행동을 보자.
혼인날 잔치의 끝무렵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지중해 지역에서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저주나 마찬가지다. 그런 문화일 정도로 죽을 때까지 마시는 게 그 지역의 잔치다. 예수님은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이제 마실만큼 마셨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며 근엄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물을 한 가득 길어오게 하여 그 물을 전부 다 포도주로 바꿔놓았다.
과거엔 이것을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처럼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고 해석했지만,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이 잔치 일화를 우리 삶에 빗대어 다시 해석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잔치여야 할 날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다. 포도주가 없는 낙심할 상황에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잔치가 지속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party is over 상황에 포도주를 가져오셨다는 것은 향유와 축제의 영성말고는 해석할 길이 없다.
복음서의 또 하나의 사례를 보자.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였다. 그 죄인들과 설교나 예배 같은 게 아니라 그들과 어울려 먹고 마셨다. 대표적 예가 삭개오다. 그 누구의 초대도 받지 못했고 그 누구도 초대할 수 없었던 삭개오의 집으로 가서 그와 함께 먹고 마셨을 뿐이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정죄하러 오신 게 아니라 한번도 축제가 뭔지 잔치가 뭔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삭개오와 초콜릿 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러 방문한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반성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 온전히 바뀌는 것이다. 복음서를 통틀어 삭개오만큼 회개한 사람은 없다. 먹고 마심으로써 향유와 축제의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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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향유와 축제의 영성을 받쳐주는 기둥인 교회사의 전통적 근거 세 가지다.
1. 첫번째는 창조의 영성이다.
영성 신학은 크게 구속 영성과 창조 영성으로 나뉜다. 구속 영성은 인간의 타락과 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창조 영성은 인간과 세상이 하나님의 뜻을 닮은 선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서로 공존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너무나 전자에 치우쳐진 영성 신학이었다. 기독교는 모순된 것을 같이 끌어 안아 긴장을 유지하는 데에 있다. 한 쪽으로 치우치면 편하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런 기독교는 옳지 않다.
불확실성. 이것이 창조적 긴장이다. 이것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창조적 영성을 가지려면 현재 한 방향으로 치우쳐진 기독교에는 향유와 축제의 영성이 필요하다.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점령했다는 화두가 한국 교회를 지배했던 90년대를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게으름에서 온 것이다. 미국 남부의 아주 폐쇄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일부 교회의 의견을 아무런 거름체도 없이 맹목적으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게 바로 구속 영성에만 입각한 문화관이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악하고 더럽기만 한 것이 아니다. 죄가 있더라도 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생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이 땅의 모든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악인이 치는 피아노 연주는 악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남아공의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쓰신 책 제목을 보자.
"선하게 태어난 인간"
이게 말이 되는가. 남아공 백인우월주의 하에서 인간이 얼마나 악랄하고 비열할 수 있는지 평생을 지켜보신 분이다. 그런 분이 책에 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인간의 선함이 너덜너덜해질 순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은 달라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으며 선을 위해 지음받았다."
투투 주교와 달리 죄의식을 부추기고 인간의 죄성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지으신 선은 죄보다 더 크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균형을 잃어 인간에 대한 끝도 없는 낙관론을 펼치는 것도 안 된다. 다만, 그 모든 비열하고 더러운 것을 알면서도 인간의 선함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창조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창조영성이 있어야만 self-acceptance 가 된다. 그리고 이런 자기 수용이 되는 사람만이 타인도 수용할 수 있다. 내가 나를 혐오하고 정죄하고 내안의 여러 요소들을 더러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한쪽을 일방적으로 죽이려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죄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10대들의 학교 폭력도 자기 수용이 안 되는 아이들이 원인일 수 있다. 자기 안의 찌질함을 수용하지 못하는 A가 찌질해보이는 B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저지르는 일이다.
2. 두 번째는 켈트 영성이다.
영성 신학은 지역적으로도 분류된다. 지중해 지역, 동방 교회 지역, 그리고 켈트족 지역이다. 켈트 영성은 창조 영성을 역사적으로 가장 잘 구현한 곳이다. 한국 교회는 지중해 영성의 종교 개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성과 속을 분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와 인간의 죄성과 속죄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켈트 영성은 그러한 경계를 지워버리는 한편, 구속 영성보다는 창조 영성 쪽에 더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온 세상이 창조주의 입맞춤에 안겨 있다는 것이 켈트 영성의 근간이다. 이들도 속죄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처럼 집요하게 죄를 물고늘어지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놓쳐왔던 생활의 소소함에 집중한다. 아침에 창을 열었을 때 첫 햇살이 내 뺨에 닿는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이 켈트 영성이다. 일상의 영성과 소소한 삶이 이분법의 신앙으로 소외되지 않는다.
이들의 식사 기도문을 보자.
"땅의 열매를 복되게 하소서. 농부들의 손을 복되게 하소서. 일꾼들의 손을 복되게 하소서. 이 음식의 빛깔과 질감을 복되게 하소서. 나의 오늘을 기쁨의 순간순간으로 복되게 하소서. 추수하는 이주 노동자의 굳은 살 박힌 손을 복되게 하소서. 제빵사의 밀가루 묻은 손을 복되게 하소서."
우리의 그간의 식사기도는 이것에 비하면 진정한 식사기도가 아니었다. 식사기도를 빙자한 헌신 결의 기도였다. 음식과 식사 자체를 놓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밥 먹고 힘내서 주님 사역 열심히 하겠다는 내용이다. 식사와 먹는 행위를 성스러운 것과 분리하며 거룩한 무언가를 위해 수단화시키는 기도였다.
3. 세번째는 감각의 영성이다.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기독교는 추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물질적인 종교다. 신이 마음 속에 계신 게 아니라 직접 만져지는 물질로 몸으로 오신 것이다. 몸은 이처럼 중요하다. 우리 몸이 성전이라 하셨다.
그러면 몸이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감각이다.
보고 듣고 먹고 만지는 것들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만질 때, 그 때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켈트 영성의 시조인 아일랜드의 수호신, 성 패트릭의 기도문에 이것과 똑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나와 눈을 맞추고 대화하는 상대의 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나의 이름을 담는 그 입술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내용이다.
한 신학자의 말로 정리해보자.
"우리 모두의 구원자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감각을 통해 온다. 인간의 감각은 우리를 영적인 것으로부터 떨어뜨리는 유혹의 존재가 아니다. 영성과 감각은 함께 한다."
살아가면서 이 여섯가지 항목을 기억하자.
일상 영성의 첫 걸음은 향유와 축제의 영성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커피 한 잔, 밥 한 숟갈, 친구와의 수다, 음악, 아름다운 꽃들을 마음껏 향유하자. 그렇게 일상을 즐기는 것이 하나님께 우리의 삶으로 영광 돌리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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