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과 소박함의 영성 - 맘몬에게 똥침을 놓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what drive my life?
한국인, 그리고 우리의 삶을 끌고가는 것은 두려움 그리고 돈이다.
심지어 교회 다니는 우리들마저도 맘몬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상에서 우리가 무심결에 뱉는 "그래도 돈이 최고지." "돈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어? "라는 말들은 "하나님이 최고지." "하나님 없이 어떻게 살아." 와 같은 종교적 발화와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숭배 대상만 다를 뿐. 그런 발화가 나오는 사람은 크건 작건 간에 맘몬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돈과 물질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짐 왈라스라는 보수신학자가 있다. 그가 짚어냈듯이 성경의 대부분의 말씀은 돈과 실제적 경제 활동과 관련된 삶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것들을 다 거두어내면 그 두꺼웠던 성경이 아주 얄팍해지는데, 우리가 교회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은 이 얄팍한 것들 뿐이다. 즉, 이 이야기는 우리가 성경적으로 돈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어야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일상을 꾸려가야하는지에 관해 거의 배우지 않았고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돈에 관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성경에 명확히 나와있다.
잠언과 로마서에,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모습에.
잠언에는 부자가 되는 것을 꿈꾸지 말라고 나와있고,
로마서에는 "너희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라는 가르침이 나와있다. 낮은 데 처하라는 말씀은 겸손하라, 늘 겸허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 말씀의 영어 버전을 찾아보면, "Associated with the lower posiotion people" 이다. 상류층의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을 바라지 말고, 가난한 자들, 사회의 취약 계층들과 즐거이 어울리고 그들과 연대하라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자. 교회는 군인과 부자에게 세례조차 주지 않았다. 군인은 전장에 나가서도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나서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고, 부자임을 드러내는 자주색 옷을 입고 남과 구별되게 살아온 부자는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주는 명백히 사회적 약자, 가난한 자들을 지독히 편애하는 분이셨다는 것이다.
반례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혈통과 관계없는 오직 능력만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지위까지 도달한 요셉이나 다니엘같은 인물도 나온다.
그들을, 그런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도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이의 삶이 다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요셉과 다니엘처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만약 하나님의 낮은 데로 가라는 명에는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런 기도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람은 부하게 해달라는 것, 성공하게 해달라는 것이 다 자기 욕심에서 기원한 것이다.
예수님이 가난한 병자를 치유하셨던 이야기를 하나 하고자 한다.
예수님이 병자에게 너 낫고 싶냐 물으니, 그 병자 한다는 소리가 "저기 저 베네스다 연못에 제일 처음 들어가서 씻으면 병이 낫는다는데요?" 였다.
베네스다 연못은 처음 들어간 자만 치유된다는 점에서 승자독식의 winner takes it all 방식이다. 이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승자가 결정된 게임이다. 돈 있고 권세있는 자가 사람 풀어서 다 막은 다음 자기가 그 연못 들어가면 게임 끝이다.
예수님은 그 방식대로 하지 않으셨다. 그냥 그 병자를 낫게 하셨다.
이와 같이 공평하지 않은 룰이 적용되는 경쟁을 거부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적용할 수 있다.
들러리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말콤 엑스가 주장했듯이 new rule game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만든 규율을 따라 살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안정감을 추구한다.
문제는 우리가 돈과 물질이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정의 확보는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에 대해 일본의 한 신학자가 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holy insecurity"
어디로 갈지 아는 것보다 모르고 사는 것이 오히려 우리 삶에 안정을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정주민의 삶보다 유목민의 삶이, 축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배부르게 먹고 즐겁게 다 쓸 수 있을 만큼의 재물만 소유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더 큰 안정감을 가져온다는 것을 아는가? 내가 다 쓸 수 없는 그 이상의 재물은 똥이다.
우리는 자족과 연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더 큰 부를 동경하고 상류층을 꿈꾸라 하지 않으셨다. 현재 나의 삶에서 소외된 자와 연대하고 공동체적인 삶을 살라고 하셨다.
물론, 돈 없으면 서럽다. 불편하다. 맞으면 당장엔 아프고 화가 나듯이 가난한 상황도 당장에 눈물이 나고 우울해진다. 그러한 분과 아픔을 품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이다. 나는 돈이 없어서 아끼는 사람의 결혼식에도 못 간 적이 있다. 돈이 없음이 초라하고 서글펐다. 여기까지는 죄책감을 품을 필욘 없다. 그러나 그 마음을 일주일 이상 품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의지인 것이다.
나는 가난하게 살고 있다. 6인 가족이 최저 생계비로 생활하는 차상위계층 가족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예수님이 제자에게 말씀하시길, 나를 따르려면 그에 따르는 값을 계산하고 오라 하셨다. 나는 내가 한 선택에 따르는 불편과 서러움을 응당 알고 있었지만, 그 삶은 내가 선택한 삶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공정하지 않은 경쟁이 만연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그들의 룰을 따르지 않기로 했고, "덜 벌어 덜 쓰자" 라는 모토를 가정과 내 삶 전반의 표지로 삼으며 살기로 했다. 자발적 가난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우리 가정은 가난해서 가난하게 사는가? 그렇지 않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떠한 가능성을 분명히 닫아놓지만, 반면 다른 가능성이 열리게도 해준다. 조금 불편하고 없이 사는 것이 모든 것을 원자화하는 자본의 삶보다,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개인화 된 인간 사이에 유대와 연대를 불러온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맛볼 수 있는 기쁨도 있다.
한 가지 사례를 들겠다.
아내의 한 일터 동료가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먹거리를 유기농으로 바꿔보라는 권유에 그런 음식은 부자들이나 먹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차상위계층인 우리 집 사람들이 먹는 유기농 식품을 한 달 소득이 우리보다 훨씬 많은 그 집이 못 먹는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삶의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돈이 생기면 집부터 사야하고 애들 학원부터 보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집을 안 사고 차를 안 샀다. 대신 유기농 식품을 먹는다. 다른 것엔 돈을 쓰지 않지만, 아파트 안 살고 수유리 허름한 집 텃밭에서 야채를 일구어 유기농 채소를 먹고, 우유만해도 아무 우유나 사먹지 않고 생태적으로 올바른 환경에서 만든 우유를 엄별하여 먹는다. 그런 우유 비싸다. 그런데 나는 집 안 사고 차 안 사고 친환경 유기농 식품을 먹는다. 내 삶의 우선순위는 집, 차가 아니다. 그런 것보다 생태적인 삶이 우선순위가 된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겠다.
캐나다 생활이 끝나갈 때쯤 보니 천만원 목돈이 있었다. 이 돈이면 한국에서 저소득층 전세 대출을 받아 주거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그 돈으로 아이 넷과 5개월간 세계 여행을 떠났다. 그 때 가고 싶은 데 다 가봤다. 사막도 가고 쿠바도 갔다. 그 때 아들이 이렇게 얘기했다.
"아빠, 우리 가난하지? 근데 우리가 가난하니까 이렇게 여행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이처럼 우리집 식구는 역설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내가 60만원 갖고 결혼했고, 현재 이처럼 산다고 해서 여러분 보고 다 이렇게 살라는 것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는 것은
어떠한 삶을 살든지, 물리의 위치에너지를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를 생산한다는 것을 다 알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라고 하셨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주가 세상의 빛이 되었듯이,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으면, 그 폭의 차이만큼이 빛 에너지로 전환되어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다. 더 크게 내려놓으면 더 큰 빛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은 인간 중심의 신학에서 생명의 신학, 생태의 신학으로 가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다음 시간에 이 부분을 다루도록 하겠다.
[부록편] 가난의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지 않고도 잘 사는 비법
1.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한다.
이발, 케이크만들기, 그리고 심지어 출산과 산바라지마저도.
우리는 애 넷을 병원 안 가고 집에서 낳았다.
2. 꽃! 음악! 집에 끊이지 않는 손님!
아무리 돈이 없어도 집안에는 늘 꽃이 있게 한다.
꽃은 부요하고 풍요로운 마음의 비결이다.
3. 생태적 삶, 뒤뜰이 있는 삶.
캐나다에서 살 때 텃밭있는 집을 택하는 대신 자동차를 포기했다. 외국에서 자동차 없는 삶이 어떤 삶인지 아시는 분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우리가 먹을 것은 직접 길러먹었다. 이 삶은 수유리에서도 이어지고 있고, 순환하는 먹거리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4. 자기 전에 책 읽어주는 아빠, 온갖 식물을 가르치는 아빠
자기 전에 반드시 한 시간 동안 책을 읽어 준다. 30분은 성경이고, 나머지 30분은 온갖 주제의 책들을 다 섭렵해서 골고루 읽어준다. 그리고 온갖 풀, 꽃 다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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