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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영화 <스토커(stoker)>

by 기름코 2014. 1. 13.

 

 

 

1.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요즘 세태대로 봉준호와 박찬욱을 비교하자면 봉준호 감독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수더분한 일상의 디테일들이 나의 취향이고, 플란다스의 개부터 시작해서 그의 작품들을 다 보고 나면 언제나 영화 속 인물이 내 마음에 남아 곱씹어 생각해보게 한다. 한마디로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일상과 가까운 사람들이라 더 편하게 해석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난 영화에서 이런 부분들에 가중치를 두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반면, 박찬욱 영화 중에서 인상적이게 본 건 박쥐지만, 재미있게 본 것은 올드보이와 스토커뿐이다.

 

올드보이는 액션 영화같지만 사실은 감성의 결을 건드리는 영화다. 이 영화는 두 인간 안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인 혼란을 드러냈다. 더불어 가벼운 말 한마디가 불러낸 모든 참사의 책임이 과연 나불대는 입이었나, 아니면 그 사건 자체의 필연적인 파국이었나 하는 질문을 나는 받았기 때문에 그 후에도 여러번 되풀이해서 생각해보게 만들어서 쉽사리 잊지 못할 영화가 되었다. 서로가 물리고 물리는 관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선이 분명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쿠엔틴 티란티노 감독의 킬빌이나 장고는 통쾌하고 즐거운 반면 박찬욱의 복수 세계관은 늘 보고 나면 기분이 침잠한다. 심지어 절대악을 조지는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복수하는 자도 함께 어딘가 망가지고 되돌아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닥 기분 좋은 복수극은 아니었지.

 

아무튼 이러한 지점에서 올드보이만은 적어도 한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영화였기 때문에 이제껏 보지못했던 박찬욱만의 비주얼 연출이 더더욱 돋보이며 대히트를 친 게 아닐까나.

 

하지만 그 후 박찬욱 영화가 올드보이만큼 대중의 반응 측면에서 히트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감정 중에서 불쾌함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선적이고 암튼 뭐랄까 찝찝한 어두운 면만을 편애하며 집중적으로 그것만 건드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영화의 연장선이 스토커다. 스토커는 내가 보기에는 잘 만든 영화다. 일단 줄거리가 나는 매우 재미있었고, 첫 장면부터 눈을 뗄 수가 없는 흥미로운비주얼, 어떻게 이 사람들을 다 데려왔는지 캐스팅 잘 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각 역할에 딱 맞는 배우들, 각 소품과 장면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들 등이 대단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꽉 채워진 코드와 텍스트들 앞에서 과식으로 버거울 정도다. 한국 감독 중에서 누가 박찬욱만큼 이러한 재능을 갖고 있을까 싶다.

 

하지만 핵심 인물들에게 대다수의 관객들이 감정이입을 할 수 없어 시종일관 참여하지 못하고 관찰자의 입장에 머물게 한다는 점, 영화의 시작과 결말에서 너무 확실히 드러나는 세계관이 보편적이지 않고 사람들이 오히려 싫어하는 결론이라는 것이 흥행에 있어서만큼은 문제가 될 것 같다. 파격적인 소재인데 결론마저 너무 분명해서 관객이 비집고 들어가 자신의 주장이나 상상력을 발휘할 공간이 매우 적다.

 

비슷한 소재로 미드 덱스터가 있다. 근데 이것은 드라마니까 매우 다양한 스토리와 많은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에 덱스터도 보다 입체적이게 보이게 되고, 살인자이지만 일부 공감도 하며 극에 빠지는데, 스토커는 인물들이 색이 분명한 것은 좋으나, 보편적이지도 않은 인물들이 별다른 갈등도 없이 의사결정을 빠르게 내려버리니까, 도저히 감정과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다.  

 

2.

 

이 영화 도입엔 누구나 손꼽을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I'm not formed by things that are of myself alone

I wear my father's belt

tied around my mother's blouse

and shoes which are from my uncle.

 

This is me.

 

Just as a flower doesn't choose its color 

we are not responsible for what we have come to be. 

 

Only once you realize this, you become free

 

And to become adult is to become free.

 

 

이보다 더 패배적이고 시니컬한 자아평이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은 자궁에서 얼마나 더 멀어질 수 있냐는 누구나 품고 있는 실존적 질문에 "그건 불가능해, 타고난 본성에서 단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지." 라는 

답을 딱 하고 내려준다. 

 

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보면 살인자의 매우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개인이란 참 드문 존재라오."

 

융도 말했지.

수천년의 인류가 쌓아온 집단 무의식이 현재의 인류에도 내재되어 있다고.

 

이처럼 시공간에서 완전한 독립적 존재인 '개인' 이란 것이 철저히 부정당한 것은 사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일부 맞는 말이기도 하지.

 

하지만 본질을 부정하고 오히려 선택의 축적이 나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현대철학의 실존주의와 완전히 상반되는, 본질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이 선택을 좌우한다는 결정론적 사고는 누구나 인정하기 싫고 거부하고 싶은 세계관이다.

 

상류층의 교양과 지식이, 그리고 정제된 환경과 교육이,

더 나아가 인간 사회가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올바름에 대한 잣대들에게서 한 인간의 아직 갓 피우지도 못한 무시무시한 본성이 얼마나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이 영화가 이 세계관을 성소수자들의 이슈를 통해 드러냈다면 이와 같은 거부감은 없었을 것 같다. 당신이 이성을 좋아하듯이 나의 타고난 본성은 동성을 좋아하는 것일 뿐, 그러니 주어진 나의 본성을 존중하고 나의 자유를 구속하지 말라고 하면 누가 이의제기를 하겠는가. 다만 이 영화가 그 본성과 자유라는 것을 사이코패스를 통해 드러내니까 거부감이 드는 것이지.

 

따라서 소재를 가리고

저 대사만 곱씹어 생각해본다면,

각자 거둬가는 의미는 보다 풍요롭고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3.

 

인디아의 각성과 성인으로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질문 하나.

 

인디아는 왜 삼촌을 죽였나?

 

엄마, 아빠, 삼촌은 인디아의 3가지 유형의 양육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인디아의 섬찟한 본성을 앞에 두고 나타나는 엄마의 거부감과 그에 모순된 보호 본능, 아빠의 애정어린 훈련과 다스림은 이해받을 수 있는 부모의 두 가지 유형이다. 반면 삼촌은 인디아에게 어마어마한 집착을 보인다. 심지어 인디아는 자신과 피가 같은 동류이기 때문에 다른 가족과 달리 본인을 수용해주고 함께 떠나줄 것이라고 믿고 있기까지 하다. 인디아에 대한 애정 구걸과 소유욕은 질릴 정도다.

 

삼촌은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인디아와는 다른 유형의 살인자다.

타인의 애정과 관심을 목적으로 그것에 방해되는 것을 죽여왔던 삼촌의 살인 충동은 인디아의 감정이 배제된 그저 포식자 짐승과 유사한 본능으로서의 살인 충동과는 성격이 다르기까지 하다.

 

인디아는 엄마, 아빠, 삼촌으로부터 조각 조각들을 물려받았지만,

전혀 다른 하나의 인격체인 인디아로서 존재하는데 삼촌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자식을 부모 자신과 분리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적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곁에 두는 부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인디아는 본능적으로 누구를 죽여야할지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생존과 독립에 걸림돌이 될 부모 유형이 누구인지.

 

성장은 독립과 동의어지 

자신을 발견하게한 자에 대한 동일시와 사랑이 아니니까.

 

불교에서 왜 네 안의 부처를 죽이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 가라 했는지

이 영화를 보고 이해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게 인디아의 성장영화라면

인디아는 엄마가 아니라 삼촌을 쏴죽이는 게 맞다.

 

삼촌을 쏴죽이고 법적 성년으로서 엄마가 있는 부모의 터전을 떠나,

자기  혼자 차를 몰고 달려나가 자신의 첫번째 살인을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완수하는 인디아의 모습은 소재가 살인만 아니라면 멋질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