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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즐거운 나의 집

by 기름코 2011. 3. 2.

              결국 밤을 새고는, 새벽 첫차를 타고 제제와 엄마를 만나러 집에 내려갈 것이다. 
              이 놈의 책 때문에.


1.

3월 2일부터 새 마음 새 뜻으로 분골쇄신하려 했으나, 잠친구로 삼은 책 한권이 잠원수가 되어 지금까지 깨어있다. 그 원수의 정체는 2009년 봄 코엑스 반디앤루니스에서 효진에게 선물받은 <즐거운 나의 집>.  2년 전에는 3일을 붙잡고 온갖 나의 과거들과 조우하며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읽었는데, 오늘은 그 때보다 훨씬 금세 읽어버리고는 눈물 한 방울 없이 (하지만 약간의 코끝 찡함은 여전히) 빙그레 웃기까지하며 읽었다.  
'가족'이란 단어 앞에선 겉으론 씩씩한 척 해도 속으론 온갖 청승만을 부렸던 내가 2년이란 시간 동안 조금은 뽀송해지고 개운해졌나보다. 햇볕과도 같았던 오불이를 만나서 축축했던 마음을 바-싹 말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오프라인에서 하진 않았지만, 
관계가 깊어지기 전 헤어지냐 마냐 매일 노래를 부르던 시절에, 오불이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2010년 초에 부지런히 원서를 쓰면서, 주민등록초본등본 및 가족관계증명서 같은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떼러 다녀야 했는데, 그 때마다 내 정신은 새학기 호구조사가 괴로웠던 초중고 시절로 돌아가 기가 한풀 두풀 꺾여서는 반죽음 상태로 집에 힘없이 돌아와야만 했다. 그 종이 한장 따위가 뭐라고,  그렇게 넉다운 됐는지. 아마 여러가지로 우울함이 겹쳐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는 오불이에게 메신저로 이렇게 말했다. 서류 한 장일 뿐인데 내 이름 석자만 쓸쓸히 적혀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참 속이 상한다고.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다고. 그러니까 오불이가 다른 섣부른 위로를 하는 대신에, 단 한마디를 했다.
"괜찮아, 곧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히게 될 거야."

그것이 처음으로 오불에게서 들은 프러포즈였다. 달랑 3일 정도 사귀었을 시기에 아직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벌써부터 나보고 친정(대전)가니 연락이 없네~ 애는 셋을 낳자 어쩌구 했던 예전 남자친구였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오불이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세상 그 어떤 말보다도 믿음이 가고 듬직하고 고맙고 눈물이 났다. 이 사람은 단순한 연인이 아닌 내 가족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평범한 집안에서 무난하게 자란 딸들을 선호하는 결혼시장에서, 나의 결핍을 온전히 다 드러내었는데도 그럼 내가 너의 가족의 되어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딱 한 마디만 하는 그가 신기하면서도 고맙고 사랑도 막 샘솟고 그랬다. 남자란 존재에게서 처음으로 느껴봤던 부정이었다. 그걸 부정이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남녀간 애정 혹은 연민이라고 얘기하기엔  적확함이 떨어지고, 엄마가 내게 쏟는 사랑과 비슷함을 느꼈기에 부정이라 썼다. 남자는 여자에게 욕정만 품거나 자기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나를 이기적으로 이용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처럼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다 수용해주고 사랑해주고 더 나아가 버팀목까지도 되어주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또, 객관적인 자나 저울을 내세워 나를 재단하고 가격표를 붙이지 않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우를 볼 때,
스킨십 진도가 연인 관계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척도가 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와는 사귄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키스를 했지만,
그에게 내 마음을 허락한 것은 그 즈음 그 말 한마디부터였다.
덕분에,
마음을 섞고 일상을 포개는 기쁨을 오불을 만나면서 차근차근 알게 됐다.  

수많은 인연 중에 반려자의 위치까지 오게 되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 서로의 무의식에 감춰져있는 결핍 혹은 이전 연애에서 받았던 트라우마와도 같은 상처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슬금슬금 메워주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종국엔 기필코 자아를 더 건강하고 밝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사람. 멋은 좀 부족해도 감동을 주는 사람.

오불이를 만나면서  내 아이의 아빠가 꼭 이사람이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자꾸 오불에게 든든한 연인이 되어주는 게 아니라 '아빠에게 사랑받는 철없는 외동딸' 이 되려고 하는 것. 여자친구를 엄마로 여기는 남자들이 많다고 하는데 우린 그 반대인 것 같아서,  늘 이성으로 억누르려 노력한다. 나는 절대로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오불이에 관한 건 할 말이 진짜 많지만, 이쯤에서 줄인다.
여하튼 나는 이 남자와 곧 <즐거운 나의 집>을 꾸리게 된다. :) 


2.

2년 후에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위녕보다는 그 부모들에게 초점이 더 맞춰졌다. 
자식으로서의 상처보다 부모로서의 삶과 숙명에 대해 생각해봤달까.   

곰탱이(공지영의 첫번째 남편)와 꽁지 (공지영의 애칭)의 이혼과 재혼을 보며,
아직은 알 수 없는 오불과 그심의 미래가 걱정이 됐다. 아아, 성공적인 결혼생활이란 정말 힘든 일 같아.....

오불이와 내가 어떤 가정을 만들어가게 될지,
우리의 아이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 부부를 감동시키고 때론 마음 아프게 할지,
기대 3 걱정 7이다.

우린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는 평생의 연인으로서.
또,부모로서는 부모의 운명이 자식 상처주기이긴 하지만,  요리조리 잘 피하거나 성숙하게 대처해서 웬만하면최소화했으면....
아아 내 자식들아... 내 남편아..
불완전한 내가 비록 가정의 존재들을 눈 먼  소경처럼 더듬을지라도
너무 서운해 말고 이것만은 꼭 알아주오, 내가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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