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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전시회] 정현's 덩어리 in 서울 시립 남서울 미술관

by 기름코 2024. 2. 11.

요즘 매주 수요일, 볼 일이 있어 사당역에 간다. 1시간 남짓한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배회하다가 남서울 미술관을 발견했다. 거의 모든 것이 잿빛이고 삭막한 사당역 근방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근대화 시기에 지어진 것 같은 예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을 발견했을 땐 맑은 물에 눈이 씻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레는 기분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1층에서는 무슨 조각 전시회를 하고 있었는데, 별 감흥이 없었다. 기대없이 2층으로 올라갔는데, 처음 들어보는 정현이란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기에 작품 그 자체에서 스스로 의미를 얻기보다는 작품 설명글을 집중해서 읽고 거기에 기대 작품을 눈으로 더듬어 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작품인가 벽에 써 있는 설명을 읽어내려갔는데, 와 생각지도 못한 데서 감동을 받았네. 

정현 작가는 몇 년에 걸쳐 자연스레 녹물이 그림이 물들게 하여 회화를 표현하고, 자연에서 주운 돌덩이를 가지고 인체를 구현해 냈는데, 작가가 왜 녹물, 돌, 이런 것들을 주재료로 삼았는지 벽에 적힌 문구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공간 곳곳에 우뚝우뚝 서 있는 조각품보다 나는 작가의 발상과 생각에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찮게 보이는 것에서 발견되는 가치"

"말로 표현되기 이전의 것, 살아있음 그 자체" 

"날 것, 예측을 불허하는 이미지" 

"느닷없음, 비탄으로부터의 해방"

"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헤맴들의 깊이" 

"새로움은 새로운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롭지 않은 것에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나의 경우 대상과 나 자신과의 관계를 꾸준히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움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스스로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재료의 물성과 특성에서 비롯된 서사를 강조"

"자기표현을 주장하기보다 재료가 고유 존재로서 내포하고 있는 시간성, 기억, 역사에 주목" 

다음의 말도 기억에 남는다. 

"내 작업은 격렬하게 폭발하고 발산 뒤에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들여 더 조용해지고 담담하며, 주장하기보다 성찰하는 것이고, 어디서 왔나,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동작은 화려하지 않고 정지되어 절제되어 있으나 그 안에 많은 것을 담으려 했다." 

나는 위 문장 앞에 오래 머물렀다. 곱씹고 꼽씹었다.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사유의 방식이 아닌가 싶다. 안타깝게도 나는 자라면서 저런 걸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욱 내 자녀에게 만큼은 격렬하게 폭발하고 발산 뒤에 해소하는 사람이 아니라라, 주장하기보다 성찰하는 사람이 되어 보고자 한다. 또 부모로서 나를 주장하기보다 아이를 잘 관찰하고자 한다. 

다음 문장을 읽을 땐 화가가 날마다 드로잉을 하며 사유의 재료를 쌓아가듯, 난 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감정을 살리기 위해서는 메모를 하듯, 일기를 쓰듯 드로잉을 남긴다. 조각은 한 작품을 마무리하는 데 몇 주씩 걸리지만 그 사이에 튀어나오는 많은 생각과 감정의 편린을 담아내기에 드로잉이 적절했다. 조각은 작업 시간이 길고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작업 도중에 최초의 감정들이 상쇄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작업을 하면서 또 다른 상상력이 풍성하게 나오기도 한다. 에스키스(모형)를 앞에 놓고 작업하면 생명력을 잃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드로잉을 걸어놓고 보고 느끼면서 감정을 살리며 던진다. 이렇게 되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정들이 툭툭 튀어나오게 된다. 물론 최초의 드로잉과 거기서 나온 조각이 다른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입체의 성질, 재료, 사용하는 도구의 맛들에 의해서 다른 세계로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장하기보다 성찰하기' , '최초의 감정을 살리기 위해 드로잉(=메모 혹은 일기) 하기' , '자기 표현 수단이 아니라 고유 존재로서 대상 파악하기' 이런 것들은 비단 예술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부문에 적용해도 될 태도다. 2024년은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그리고 일어날 해다. 물리적인 삶의 장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과 생각이 놓이는 사유의 방도 새롭게 정리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