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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웹툰 <니나의 마법서랍>, 당신도 중독자입니까?

by 기름코 2023. 10. 9.

웹툰 작가 중에서 손꼽게 좋아하는 랑또 작가. 개그 감각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진지하고 메시지 깊은 만화도 얼마나 잘 만드는지 진짜 천재다, 천재. 개그와 공포는 한끝 차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역시나 랑또는 공포물도 잘 그린다.

암튼 그 분의 작품 하나를 연재 중일 땐 못 보고 연재 완료된 지 한참 지난 후에야, 이번 한글날 연휴를 활용해서 다 보았다. 그것은  <니나의 마법 서랍>!  첫인상은 유치뽕짝 판타지일 것 같았는데 막상 뚜껑을 여니, 세상 진지하고 다크한 내용이었다. 연재 종료 만화라서 쿠키까지 써 가며 숨도 안 쉬고 쭉쭉 몰아 봤네그려.

이 웹툰은 중독에 관한 만화인데, 마법의 서랍(소랍 안의 카드에 소원을 쓰면 서랍 안의 세계에서만 모든 것을 이뤄줌 )을 통해 인간이 왜 중독에 빠지고 왜 중독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운지 너무 잘 그려냈다.

인상적인 구절을 잊기 전에 기록해 둔다.

#99화 중독에 관한 니나의 메타인지 가동 장면

"이미 무의식적으로 내가 성공할 만큼의 노력을 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내가 노력한다고 성공할 것 같지 않으니까. 성적도 어중간 별다른 특기나 재능도 없고 대학교도 점수 맞춰서 작늠 회사도 취직 못 해서 전전긍긍. 그러니 항상 마음 한편에서 불안해하지. 그래서 이 서랍에 빠져든 거야. 지금 당장 즐거운 일을 하면 불안이 잊혀지니까. 5분만 더 10분만 더 하면서 몇 시간을 날리고 점점 더 자극적인 걸 찾으면서 점점 더 무뎌지고 절제 없이 본능대로 행동하고 1차원적인 쾌락만 추구하고. 결국 현실은 엉망이 돼서 노력으로 복구하긴 더 힘들어졌는데 그 결과에 책임을 지기는 싫고 모든 걸 한방에 만회할 요행만 바라니까. 그런 인간의 최후를 빤히 보고서도 난 절대 아니라고 난 저런 인간이랑 다르다고 끝까지 인정 안 하니까. 그러니까 서랍이 날 선택한 거야."

#100화 니나와 현재의 대화

니나는 중독에 취약한 평범한 인간의 대표고, 현재는 중독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강인한 사람인데 이 두사람의 대화에서 중독이 단순히 약한 인간의 문제만이 아니며, 따라서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단 것을 암시한다.

니나
"현재씨, 왜 서랍이 현재씨를 찾기 위해 절 선택했는지 알았어요. 제가 타고난 재능도 없으면서 노력도 안 하고 의지도 약하고 책임감도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 절 내보내봤자 반나절도 못 버티고 다시 들어올 거예요. 그러니까 현재씨가 나가요. 다시는 절 되살려내지 말아요. 현재씨 전 너무 고통스러워요. 제발 저를 죽여줘요."

현재
"니나씨,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꿈꾸는 환상이 있고 잊고 싶은 과거가 있고 도피하고 싶은 문제가 있어요. 그러니 서랍이 니나씨가 아닌 다른 누굴 골랐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밖으로 나간다고해도 저도 결국 이 안에 돌아올 거예요. 그냥 이 서랍이 그런 거예요."

#100화 니나의 성장

"이 서랍에서 유일하게 남는 건 기억이야. 경험해 본 기억. 현재씨에게 이런 기억을 남기면 안 돼. 지금 이 서랍에서 남겨야 하는 건 내가 만든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는 기억이야."

그리고 니나는 카드에 이렇게 적어 넣는다.

"이 서랍 안의 모든 진짜를 밖으로 꺼내줘."

그러자 서랍 안으로 사라졌던 현실의 모든 것들이 다시 다 튀어나오며 방이 엉망이 된다. 숨기고 싶었던 과거를 들추는 사람도, 더러운 쓰레기도. 중독이 삼켰던 모든 것들이.

#101화 중독에 대한 취약함을 인정하기 

니나
"미안해요 현재씨. 다시 살려내지 말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전 절대 이 서랍을 못 끊을 거예요. 적어도 제 의지만으로는요. 그래서 이런 상황을 만든 거예요. 저 서랍을 버릴 수밖에 없도록."

니나는 서랍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니나와 현재는 서랍을 버리려다가 서랍을 두고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그 정도로 중독은 무서운 것이다.

니나
'이게 정말 옳은 결정일까? 앞으로 내가 이 서랍 없이 살 수 있을까? 평생 없을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닐까? 그냥 좀 절제하면서 현재씨랑 번갈아 쓰면...안 돼! 금방 또 이런 생각을!'

#108화

현재
"니나씨 전 아무래도 이 서랍을 못 버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서로 모르는 곳으로 가서 없애요."

현재는 니나에게 카드3장을 넘기고 서랍만 들고 떠난다. 그렇게 각각 분리하지 않으면, 서랍을 쓸 수 없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현재 역시 서랍에 굴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다. 카드를 들고 현재와 헤어져 뛰던 니나는 다시 갈등에 빠진다. 

"어떻게 하지? 불로 태울까? 잘게 찢을까? 물에 적셔서 녹일까? 하지만 혹시라도 카드를 완전히 없애면 서랍에서 다시 생기는 게 아닐까? 그럼 아무 데나 숨겨둘까? 그치만 만약 협박을 당해서 카드의 위치를 말할 수밖에 없으면 어떻게 하지? 아니 그 무엇보다 내 마음이 변하면 어떻게 하지?" 

내면의 갈등을 알게 된 니나는 결심한다. "이 카드는 나조차도 모르는 곳에 숨겨야 돼!" 

니나는 수백 개의 편지봉투에 사서 카드를 그 안에 넣은 뒤 마구 섞는다. 그리고 화염 속에 타들어가는 상자 앞에서 카드를 갈구하는 중독자에게 던진다. 중독자는 카드를 받고 평생 서랍 속에서 살고 싶다며 불타는 서랍 안으로 들어가 자멸하고, 니나는 불길 밖으로 빠져 나온다. 

# 110화 현재에 충실하기 

서랍 중독에서 빠져나온 김주임과 니나의 대화 

"서랍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하니까 결국 현실을 살게되더라? 아니,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하나? 처음엔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 너무 막막했는데 그냥 닥치는 대로 하나씩 해치우다 보니까 어느새 결국 다 끝이 나더라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결국은 어떻게든 결론이 나더라고요.지금은 고시원을 구해서 낮엔 알바하고, 저녁엔 독서실에 다니면서 취업 준비하고 있어요."

김주임과의 만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니나는 복권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다시 한번 흔들리는 눈빛으로 복권 가게를 쳐다보는 그때 현재의 목소리가 니나를 불러 세운다. 니나의 시선이 복권 가게에서 다시 현재에게도 돌아가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 현재씨!" 


 
작가 후기를 보면 이 작품의 메시지는 더욱 또렷해진다. 작가는 '중독은 인간을 어떻게 끌어들이는가? 인간은 어떻게 중독에 빠져드는가? 인간은 왜 중독에 빠지는가? 우리는 중독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여기서 중독 즉, 마법 서랍은 단순히 술, 담배 같은 것뿐만 아니라 니나의 원초적 욕구와 요행을 바라는 마음, 공주의 현실도피성 망상, 현재의 트라우마와 불안감, 해소욕구, 김주임의 애정 결핍성 집착 등 인간을 중독시키는 다양한 요소들을 전부 종합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겉모습은 마치 마법소녀 아이템처럼 꿈과 환상을 줄 것처럼 생겼지만 정작 서랍 속에 있던 진짜들은 온갖 쓰레기와 추악한 인간들이었다.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문제 해결을 개인의 의지에 의존할 게 아니라 자신을 통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의지력이란 결국 소모된다는 걸 인정하고 보통 사람은 그 지속시간이 짧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처음 다짐을 한 기세를 끝까지 유지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의지력이 잠시라도 생겼을 때 자신이 목표를 이룰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둬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결국 이 만화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목표를 바른 곳에 두는 것, 그리고 현실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선 개인의 의지뿐만 아니라 나아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구축해 두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세상엔 내 주의력을 흐트러뜨리고, 시간을 노리는 것들 천지다. 그런 헛된 것들에 빠져 중독되지 않기 위해서는 1) 현실을 직시하고 2) 목표를 바른 곳에 두고 3) 시스템을 구축하는 수밖에 없다. 스티븐킹이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작은 공간과 문을 닫는 것(= 차단)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웹툰 속 현재의 케이스처럼 중독은 누구나 될 수 있다. 의지력이 약한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도 현재처럼 통제력 강하고 한 의지력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나도 폰 중독인 것을 보라! 평생 몰라도 되는 온갖 콘텐츠를 따라가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꼴을 보라! 이 만화는 책 <도파미네이션>보다도 짧고 값싼 도파민에 쩔어 있는 나를 돌아보며, 반성하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진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