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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책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1

by 기름코 2022. 2. 6.

친구들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가지고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이 책은 내게 너무 어렵다. 이 주에 한 챕터씩 읽는 꼴인데도, 내용을 따라잡기가 버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구절들이 나의 생각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자본이 만들어낸 임금노동자와 임금노동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인위적 구분과 서열화를 거부한다.
자본이 사람을 임금노동자로 만들어 복속시키는 방식으로
자본은 임금노동자와 임금노동자가 아닌 다른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틈을 만든다.
임금노동자가 아닌 이들은 사회적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저항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간주된다.
- 달라 코스타(1973년)의 말 인용, 98p

나는 이 문장에 한참을 머물렀다.

나는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 내가 페미니스트인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그저 자본주의 성공 신화를 꿈꾸는 1인이었을 뿐이었다. 얼마의 가격표가 붙는 노동이냐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서열화를 했고, 그래서 가정주부가 되는 것을 밑도 끝도 없이 거부하고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가격표가 붙지 않는 무가치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고, 비싼 가격표가 붙는 알파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여성이고, 분명히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은 존재하니, 그걸 깨부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싶었을 뿐이었던 건 아닌지?

내가 정말 페미니스가 맞나 하는 생각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긴 하다.

책 <82년생 김지영>속 주인공의 어떤 모습은 지루하다 못해 공감과 이해가 전혀 안되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아래 남녀 역할의 명확한 구분 속에서 김지영이 느끼는 감정은 이해가 됐다. 명절에 시댁 먼저 가야하고, 시어머니는 앞치마가 응당 며느리가 지녀야할 필수품으로 여기는 게 당연히 정상은 아니다. 그러나 소설 속 김지영은 뭐 하나 제대로 노력하는 게 없다. 그리고 그걸 뛰어넘으려는 노력조차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평범, 직장 생활도 어떤 오기와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평범 그 자체.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낳아도 나처럼 피눈물 흘리며 직장을 유지하는 사람도 많은데, 남편 수입으로는 생활비가 충분하지 않아 어린이집에 오래 맡기고 다시 일터로 나가는 여자들도 허다한데, 대기업 남편을 둔 가정주부면서 게다가 외동을 둔 가정주부는 보내기도 힘들다는 어린이집까지 보낼 수 있으면서 저렇게 힘듦을 호소하는 게 이해가 안 됐다.

한편 요즘에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머리를 커트로 자르고 비혼, 비출산을 선언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해도 공감은 전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게 왜 안 되지? 출산과 육아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지만 뜻깊은 일이고 공동체 존속을 위한 필수적인 일인데, 왜 애엄마들을 무슨 가부장제에 복속한 사람들마냥 매도하고 지들은 대단한 선택을 한 것 마냥 우월감을 느끼지?' 라는 반감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냐면,

1)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나는 반드시 사회에 나가서 내 자리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피나는 노력 끝에 서울대에 들어갔고, 대학시절 내내 먹는 것, 입는 것 남자한테 의존해본 적이 없다. 20대에 남자한테 뭘 사달라고 해본 적이 아예 없다.

2) 결혼할 때도 반반했다. 아니 따져보니까 살면서 내 쪽이 더 많이 한 것 같다. 이건 내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다.

3) 결혼식장에서도 아빠 손잡고 들어가지 않고 신랑신부가 동등하게 서로 손잡고 들어갔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주장했다. 친정엄마는 그렇게 하면 아빠가 서운하다고 말렸다.

4) "여자 인생은 애만 잘 키워도 성공이다."라는 시아버지, "잘 되어도 남자가 더 잘 되어야 좋지. 그래야 밖에서도 보기가 좋지." "다시 직장에 나갈 거냐? 아이가 더 중요하지. 나중에 또 (일할) 기회가 오겠지." 라는 시어머니, "내 애 잘 키우는 게 중요하지. 우리가(여자들이) 공부한 것도 내 애 잘 키우려고 한 거지." "둘째는 딸이라 마음이 편해. 남자는 직업이 좋아야 되잖아. 여자는 (공부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덜하니까." 라는 형님에게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5) 지금처럼 무차별적 징병제 아래에서는 여자도 한 시민으로서 군대를 가거나 기초적인 군사 훈련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니까, 라는 이유로 뭘 시키면 안되듯이 남자니까, 라는 이유로 한 성별에만 특정 의무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

6) 출산 이후 남녀의 삶이 너무 달라지는 게 큰 불만이다. 출산 이후부터 우리 집에 남녀의 성별에 따른 분업이 생겼다. 육아휴직은 나만 했고, 그래서 나만 승진이 밀렸다. 어린이집 알아보기, 등하원, 아이 관련 물품 구입, 육아책 찾아보고 육아 공부 등 아이 관련 일들이 모두 나의 일이 되었다. 이에 대해 남편과 끊임없이 싸웠고, 시간 배분 전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7) 가정주부는 되고 싶지 않다. 여자는 서울대 나온 년이나 전문대 나온 년이나 결국은 가정주부가 된다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또한 밖에서 돈을 버는 것은 집안일보다 굉장히 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집안일은 감시자가 없지만 사기업은 성과를 내야만 하고, 감시자가 있다. 남편만 그런 부담을 지는 것은 불공평하다. 생활비도 둘이 같이 벌고, 집안일도 둘이 나눠서 하는 게 맞다.

8)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나처럼 성실한 사람조차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일을 지속할 수 없으면 나라는 망한다. 내가 끝까지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직 문화와 사회를 바꾸는 데에 목소리를 낼 것이다.

9) 꾸미는 것은 귀찮을 때도 있지만 즐거울 때도 많다. 그러나 내 몸을 불편하게 하는 하이힐은 신지 않는다. 브래지어도 안할 때도 많다. 현재 살은 많이 쪘지만 다이어트 강박증은 없다. 내 몸은 나의 것이다. 남의 도마위에 오를 대상이 아니다.

나는 왜 위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평등을 원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가부장이 갖고 있던 권위와 힘을 여자인 내가 갖고 싶어서였던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안 벌면, 능력이 안 되면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아둥바둥 어떻게든 살 자리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유독 남편하고 대화할 때만 권위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가부장들의 특성을 내가 그대로 답습한다. 내 생각을 강요하고, 가정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고 한다. 가부장제를 깨부수자는 사람이 가부장이 되어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면서 결론을 내렸는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자본주의 성공 신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자다. 그렇기 때문에 명문대 나왔으면서 남편 유학 뒷바라지만 하는 가정주부도 이해를 못 했고, 사지 멀쩡한데 일 안하는 사람한테도 주자는 기본 소득도 공감을 못 했으며, 가사일의 가치도 몰라서 제대로 된 요리도 못 했던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공부에 별뜻없다가 나이 들어서는 좋은 남자 만나서 얼른 직장 그만 두고 애낳고 살림하는 것에만 만족하는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애 낳고 살림하는 것이 아무 가격표가 붙지 않는 노동이기에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페미니즘 사상이 아니라 자본주의다.

내가 공부해야할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너무 어려워서 아직도 더듬더듬 읽어나가는 수준이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크게 깨닫게 해줬다. 이것 말고도 나의 굳어진 생각을 콕 짚어 부숴버린 문장들이 있는데, 이어서 차근차근 정리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