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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곤도 고타로 <최소한의 밥벌이> (2019, 쌤앤파커스)

by 기름코 2021. 3. 2.

내년이면 한국 나이 마흔이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매일매일 죽고 싶다 외쳤던 때도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냈을까? 80까지 산다고 치면 벌써 반이나 온 것이다. 마흔을 앞두고 요새 생각이 많다. 자꾸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 수시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사실 지금처럼 살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월급쟁이로 살면서 둘이 열심히 저축하고 불려나가는 재미, 자식 크는 보람으로도 삶은 충실히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직장이 계속 온전하리란 보장도 없고, 그 안에서 내 입지도 늘 굳건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식도 품 안의 자식일 때나 자식이지, 시간이 갈수록 속 썩을 일이나 많아지겠지. 즉, 절대로 지금과 같이 계속 살아갈 수가 없단 말씀! 현재의 직장과 자식에 기대어 얻는 안정감과 행복은 지금도 수시로 흔들릴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확실히 끝이 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내가 다른 재미를 알아 버렸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진짜 글쓰기의 즐거움!

나는 지금까지 회사를 위한 글만 쓰고 살았다. 물론 거기에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 대가로 월급도 따박따박 잘 나왔다. 그 결과, 복수의 저자들과 함께 내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이 많아졌지만, 그 책들이 정말로 내 것일까? 지금까지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회사 밖으로 나와 다른 작업을 해보니, 지금까지 회사에서 쓴 글은 내가 쓴 건 맞지만, 진짜 내 것은 아니었다.

작년에 <언_불행_배틀>, 그리고 <서_울의 엄_마들>을 여차저차해서 쓰게 됐다. <언_불행_배틀>은 지인들끼리 으쌰으쌰해서 만들어본 책이라면,  <서_울의 엄_마들>은 사이즈가 큰 책이다. 정식으로 기관의 지원을 받아 기획 단계부터 야마가 확실하고 체계가 다져진 책에 내 글이 나간 것이다. 

<서_울의 엄_마들>을 통해 내 인생과 마음이 담긴 글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올 때의 떨림, 그리고 그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의 기쁨을 어디에 비할 수가 있을까. 이 책 역시 단독저자는 아니어서 엄밀히 말하면 온전히 내 책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그냥 내 책인 것만 같다. 훗날, 기획자는 내 글이 자신의 기획에 빛을 가져다 주었다고 했다. 또 어떤 분은 내 글을 정말 인상깊게 읽었다고, 기획자에게 이 분 누구냐고 물어봤다고 했다. 책이 나온 뒤에는 독자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해서 검색도 해봤다. 내 문장을 인용하며 공감해주고, 감동을 받았다는 후기들을 발견했다. 진심으로 기쁘고 고마웠다. 사실, 회사에서 내가 만든 책들은 <서_울의 엄_마들> 보다 훨씬 많이 팔린다. 하지만 내게 더 큰 기쁨을 줬던 건 <서_울의 엄_마들>이다.

내가 이 재미를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전과 같이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출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계속 글을 써보기로 했다. 마음 속에 품어두기만 했던 장르 소설도 좀 더 진전시켜보고, 에세이도 써보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너무 시간이 없다. 그냥 없는 게 아니라 진짜 너무너무 없다. 

회사에 출퇴근 시간까지 합쳐서 매일 10시간을 쓰고, 예닐곱 시간은 자는 데 쓴다. 여기에 더해 먹는 것에, 어린이집 일에도 내 시간이 들어 간다. 나머지 시간을 좀 긁어모아 써볼까 싶지만, 내 시간은 나만 쓰면 안 되고, 아이에게도 나눠줘야 한다. 그런데 글을 쓴답시고, 한창 자라는 아이에게 줄 시간을 빼서 쓰면 안되는 것 아닌가? 이미 지금도 애를 잘 못 보고 있다. 그러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데, 내가 프로 작가도 아닌데다가, 남편이랑 함께 재테크를 착실히 하고 있는 와중에 내 수입이 쏙 빠지면 계획도 흔들린다. 그래서 요새 골이 빠개지게 고민한다. 

그러던 중 <최소한의 밥벌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저자는 아사히 신문 기자인데, 어느 날 갑자기 시골로 내려가 하루에 한 시간만 논농사를 지어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양식을 위해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글쓰기에 쓰기로 한다. 이거 뭐야, 나랑 완전 비슷한 고민을 했잖아? 동질감과 호기심에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 공감이 가고, 또 내게 하는 말 같아,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정말 이렇게 최소한의 밥벌이만 하며 꿈을 위해 살아도 될까?' 하는 의문에 저자는 자기가 사는 방식을 보면 알 거라고 유쾌하게 들려준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게 단점이지만 덕분에 나도 세뇌가 됐는지 용기를 조금 더 얻었다. 


<책 중에서>

* 난 왜 시골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나

-> 한줄 요약) 신자유주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만의 욕망에 집중하며 즐겁게 살기 위해   

"이 책은 은퇴를 걱정하며 삶을 마감할 뻔한 신문 기자가 자신의 삶에서 즐거움을 되찾은 얘기다. 즐겁고 활기 있는 삶을 살게 되면서 더 많은 원고 청탁을 받아 행복해진 글쟁이에게 관한 이야기, 어영부영 살다가 비로소 삶에 발 디딜 발판을 찾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다들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해답은 없다. 다만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다는 답은 있다. 몽상이 아니다 내가 몸소 확인한 실험의 결과다. 그게 뭐냐고? (똑같은 욕망, 그리고 '굶어죽을 것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욕망이 거의 비슷해졌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에서 사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런 생활방식에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내가 만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아주 적다. 하루 두 끼 맛난 식사, 매일 조금씩 글쓰기. 이게 내게는 생활의 전부다. - 에릭 호퍼 <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원하는 직업을 얻는 사람이나 꾸준히 그런 일터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꿈은 꿈이다. 현실 사회는 그렇지 않다. 싫어하는 일이라도 이를 악물고 해야한다. 그런데, 사람은 (자본주의 아래서 어딘가에 고용돼)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나? 노동은 괴로워야 당연한가? 원래 노동은 즐거움의 원천 아니었나?" 

"현대 인간은 부품이 되어버린 노동을 한다. 대기업에서 내가 하는 일은 컨베이어 작업의 일부일 뿐이다. 작은 톱니바퀴이기 때문에 업무의 전체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없어져도 다른 부품으로 금세 교체된다. 결국 나 같은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런 노동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 '살기 위해 참고 견디는 일'이 되는 건 당연하다."

"인간은 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노동 현장에서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살아내고 있는 어른은 과연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에게 노동이란굶어 죽지 않기 위해 하는 것, 감수해내야 할 것, 될 수 있으면 하고 싶지 않은 것, 그런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은 마지못해 하는 게 아니다. 노동은오히려 기쁨의 원천이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스스로 자기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승인' 같은 것이 었다. 노동만이 나 자신을 단련시켜준다. 노동을 통해 생존 양식을 얻을 수 있게 되면 비로소 떳떳하고, 자기답고, 굳건한 현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지금 여기(da)에 있는(sein) 것으로 자각하는 존재. 독일어로 ‘다자인(Dasein, 여기 있다)'이라고하며, 하이데거가 자신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했다."

"이렇게 하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단 선동은 믿지 않는다. 북한이나 소련이나 노동자의 유토피아를 보여줬지만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됐다. 한나 아렌트가 그랬다. 앞으로 다가올 유토피아를 말하는 자는 틀림없이 그 세계의 독재자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각자가 내키는 대로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30년 가까이 신문사에 몸 담아 잡지나 단행본 출판을 통해 수입을 얻어 필자생활을 해왔다. 이 일을 오래 해왔지만 싫증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재밌어진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매년 명확해진다. 일할 맛이 나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글쟁이로 사는 것. 하고 싶은 일,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이 일에 몰두하려면 최소한의 식량이 필요하다. 벼농사를 지으면 굶어죽을 일은 없다. 흰쌀밥을 이제 내 손으로 마련하겠다. 될 수 있으면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생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글쓰기." 

"정직원이라는 자리에 매달려 아무 의욕도 의미도 없는 일을 하며 건강도 삶의 기쁨도 잃어 간다. 너무 바쁘고 지쳐서 평소 좋아하던 영화나 책을 즐길 여유도 없다. 피곤한 몸으로 퇴근해 집에서 보는 것이라고는 티비와 스마트폰뿐. 왜 이렇게 살까? 결국 굶어죽는 게 무서워서 아닐까? 뒤집어 말하면, 굶어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사람은 쌀만 있으면 어지간해서는 굶어 죽지 않는다." 

"글쓰기를 포기하지 말라. 글을 써서 먹고살며 살아남아라. 아무리 인기 없는 글쟁이라도 반찬과 맥주 값은 본업인 글쓰기로 벌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굶어죽지 않는 최저선, 생활 방위 사수선. 그게 쌀밥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대량생산한 제품을 소비자인 노동자가 대량으로 되사는 사이클로 유지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과정에서 노동자는 결국 자본가와 기업에 엄청난 잉여가치를 몰아준다. 그러나 소비만이 인생의 즐거움이 아니다. 원래 소비하지 않고 궁리하는 일이 더 즐거웠다. '노동자 -> 소비자 -> 노동자'라는 자본주의 영원한 사이클에서 아주 잠깐 벗어나 보기로 한다." 

"하루하루 빠듯하게 사는 월급생활자는 투자해 굴릴 여유자금이 없다. 부유한 사람만 더 부유해진다. 피케티는 이런 상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찬성한다. 도덕적 양심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회를 이루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약한 동물이다. 그리고 안정된 사회를 만드는 데에 엄청난 부자 같은 건 필요없다." 

"논농사를 왜 택했냐고? 내가 하는 농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의 가치는 없다. 산업으로서는 때려치워야지. 그런데 논은 상품만 만드는 게 아니다. 블랙기업에 착취당하지 않도록 해준다. 인기 없는 글쟁이 등 누구든 상관없다. 초등학교 졸업 문집에 적은 장래희망을 좇으며 살아도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초짜가 땅을 일구고 바보가 써레질하고 얼간이가 모내기를 해도 벼는 자란다." 

"나의 농사 노동도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시작된 것이다. 잡지가 망해간다. 출판 시장이 매년 쪼그라든다. 그런데도 글쟁이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죽음에 대한 불안을 안고 어떻게든 글쓰기에 매달리려고 시작한 일이다. 쌀만 있으면 일단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농사는 지시받아서 하는 일이 아니다. 참고 견디는 톱니바퀴 일이 아니다. 소외당한 노동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어느새 변화되어 있다. 논에서는 잡초베기도 재미있다."

"나는 왜 도쿄 변두리에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좀 속된 표현을 하자면 이렇다. 글쟁이로 돈을 벌고 싶다. 그 길에 내 짧은 인생을 걸고 싶다. 기생하던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본질적인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나는 직장에서 벗어나려는 게 아니다. 어딘가에 기생하는 삶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간단하다. 굶어 죽을 거라는 공포를 이용한 지배가 본질이다. 굶주림을 가져올 빈곤에 대한 공포라는 채찍을 부활시키려는 경제 사상이다. 굶주림이 두렵다면 아무리 단순한 일이라도, 아무리 노동 시간이 길고 임금이 낮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일하라. 노동자는 결국 거절할 힘을 잃어간다. 수당을 받지 못하는 잔업이 당연해진다. 그게 세계화니까. 인도, 중국 노동자와 경쟁하며 살아가야 하니까. 소비자로서도 남들과 똑같이 행동하기를 강요당한다." 

"자본주의는 매년 생산을 확대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보다 내년, 내년보다 내후년에 재화와 서비스 생산량이 커진다. 그럴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은행은 기업에 돈을 빌려준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작년보다는 더 성장해야 한다. 이만큼 하면 됐다고하는 제한이 없다."

"멋진 식당에 가고 싶다, 셀럽이 되고 싶다, 비행기는 비지니스 클래스, 그 뒤엔 프로 야구구단 갖고 싶다 등 망상에는 어느 정도 개인차가 있을 뿐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지닌 방향성, 벡터는 우스울 정도로 똑같다. 결국 욕망이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캉의 말대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나만의 욕망, 나만의 자유를 추구할 의지를 잃어간다." 

"필경사 바틀비는 현대 노동 문제의 근원을 예언적으로 탐지한 작품이다." 

 "시대착오적 인 기업의 노예가 되어 사생활과 영혼까지 갈아 넣으며 살 수밖에 없단 말인가? 다들그렇게 산다고, 그게 인생이라고 회유하는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자들이다. 굶어 죽고 싶지 않으면 21세기의 룰 아래서 일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던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 로마도, 구소련도무너졌다.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도, 미국형 자본주의도 무너지는 날이 올지 모른다." 

* 저자가 그렇게 사랑하는 글쓰기에 대하여 

"글쟁이는 결국 보따리 장수다. 손수 기른 채소를 등에 지고 팔러 나가는 농촌 아주머니처럼 글쟁이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똑같아야 한다. 자기 기획을 등에 지고 편집부를 찾아다니며 판다. 품질이 좋으면 팔릴 테고, 형편없으면 다시는 찾지 않는다. 그러면 끝이다."

"겉모습은 중요하다. 농부는 남에게 보이는 모습이 9할이라고 한다. 농기구도 깔끔하게 정리정돈. 글쟁이에게 도구는 뭘까. 바로 어휘다. 어휘를 도구상자에 깔끔하게 정돈해 언제라도 쓸 수 있도록 해두어야 한다. 좋은 도구 즉 어휘를 모은다. 정리정돈한다. 그걸 언제나 가지고 다닌다. 가지고 다니기 위한 근력 즉 문체를 단련한다. 기술자가 농부나 글쟁이나 다를 게 없다." 

"문장을 쓰기 전에는 내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장을 조립하면서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하며 놀란다. 생각이 있어 문장이 정리되는 게 아니라 거꾸로다. 문장이라는 내 커다란 꼬리에 휘둘려 내 생각을 깨닫게 된다. 그런 내 생각을 어떻게든 상품이 될 만한 수준으로 갈고닦아 정리하고 포장까지 한 다음 편집자에게 보여준다. 나는 사명감이랄까, 의무나 책임감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즐겁다. 떨린다. 문장을 쓰고 있을 때만은 불타오른다. 타올라라, 타올라라, 뼈까지 타올라 새하얀 재가 될 정도로 다 타버리고 싶은 것이다."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 이게 아니면 삶의 의미가 없는, 인생을 걸만한 일을 찾아내라. 그리고 그것에 달라붙어 물어뜯다 쓰러져라. 글을 쓰다는 일에 내 짧은 인생을 걸겠다." 

* 농사를 하며 인생의 교훈도 얻고~

"물이 부족하다고 걱정하는 해에 오히려 풍작이 들지."

"8월 가뭄 때는 일부러 논에서 물을 빼고 지표면을 말린다고 한다. 그 이유는 뿌리가 물을 찾아, 땅속 깊숙이 뻗기 때문에 튼튼해 진다고." 

* 환경주의에 관해 내가 새롭게 배운 시각 

"논은 생물의 요람으로 불린다. 생물 다양성의 보고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표현을 붙이더라도, 논이란 원래 단일 생물을 높은 밀도에서 키워내기 위한 공간이다. 모든 생물을 지켜내야만 한다는 주장을 하면 이미 그건 논이 아니다. 그런 논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싸고 효과적인 DDT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직접 타격을 입는 쪽은 빈곤층이다."

"리스크를 완전히 없애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원리주의다. 구소련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실패한 사회주의나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내게 똑같다. 인간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상을 고집스럽고 성급하게 예외없이 추구하는 것은 원리주의의 한 변종이다." 

"탈원전을 상징하는 학자인 물리학자 다카기 진자부로는 에콜로지즘에 대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적 규범에 종속하도록 요구하며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을 현저하게 제한한다는 비판이 있다고 지적한다." 

"과격환 환경주의는 모든 자연 개조를 거부한다. 이 또한 형태를 달리한 원리주의, 파시즘 아닌가?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나 제도, 화폐 이런 헛것을 대신해 이번에는 자연이 물신으로 등장한 것 아닌가?" 

"농업을 소홀히 한 결과 자본주의가 집어삼켰다, 그러니 농본주의로 돌아가 자연과 어울려 자연스레 살아가야 한다, 이런 주장은 앞뒤가 안맞는 소리다. 기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 아득히 먼 옛날 농업이 인간사회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 된 뒤, 탐욕스런 자본주의, 시장원리주의, 남근주의가 싹 튼 것이다. 오히려 수렵채취 사회에서 남성성의 지배력이 약했다는 것이 인류학의 결론이다. 인류 역사를 보면, 수렵채취를 하는 식량 탐색형 사회의 역사는 농경사회보다 훨씬 길다. 농경사회는 기껏해야 1만 년전에 시작됐다. 사람에 따라 신체적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식량의 양은 차이가 날 테지만, 농사지을 땅이 있느냐없느냐 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차이다. 남녀 사이에도 식량을 얻는 양에 큰 격차가 나지 않았다. 온열대 지방의 식량탐색형 사회에서는 ‘경제적' 공헌도가 남성 쪽으로 극단적으로 기울어져 있지는 않다. 어린이, 특히 갓난아기의 육아만해도아버지와 자식의 접촉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식량탐색형 사회는 농경사회에 비해 길다. 결과적으로 남녀의 정치적 힘의 관계는 불평등해지기 어려웠다."

"수렵사회를 남성 중심의 마초 사회, 농경사회는 남녀 협력 사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농경사회가 육체적인 힘이나 사회관계를 이용해 토지를 집적하고 소작인을 고용해 더 많은 농산물을 획득해 마침내 권력을 집중시키기에 더 적합한 사회다. 아무리 그럴 듯하게 포장하더라도 논은 ‘해로운' 새와 짐승, ‘잡초'라고 불리는 식물을 배제하면서 단일 작물을 생산하는 일종의 ‘공장'이나 마찬가지다. 논을 일구면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대안적인 삶 

"지방은 소멸할 것이 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지방자치단체의 소멸이다. 공무원들의 직장이 없어질 뿐이다(이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상호증여가 성립할 수 있는 작은 커뮤니티를 ‘지방-로컬'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지방'이 소멸한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

"경제성장률과 살림살이가 연결되지 않는 층도 있다. 시골에서 증여경제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성장률이 오르든 내리든 ‘곳간'인 밭의 채소와는 상관없다. ‘냉장고'인 바다의 물고기들도 관계없다. 상추나 돌돔은 뉴스나 신문 따위 보지 않는다. 선물한다. 보답한다. 아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증여의 연쇄는 경제성장률 따위 때문에 단절되거나 이어지거나 하는 고리가 아니다.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상품 교환경제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에게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어떤 선물을 사서 건넬 때도 그게 돈을 주고 산 ‘상품'임은 틀림 없지만 가격표를 살짝 뗀다. 마음을 전하려 선물하는 것이니 시장에서 얼마나 교환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드러내기가 민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상품'임을 숨기려는 것이 다. 교환경제가 아니라는 시그널이다."

"일반  욕망에 얽매이지 않고도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실제로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살아내고 있는 그런 롤모델이 필요하다." 

"나는 아직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 려 하기 때문에 나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정한 ‘대략 이런 것'으로 계속 남아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다. 세상 사람이다. 불태우고 불태우고 또 불태워 뼈마저 새하얀 재가 되도록 살다가 죽는다. 실존이란 결국 ‘내일의 조'인 것이다. 고흐가 그린 농부의 구두는 있는 존재의 참 모습을 드러내는 ‘알레테이(aletheia, 숨
어 있지 않음)'라고 하이데거는말했다. 대지와 마주한다. 무언가를 낳는다. 거기서 나의 존재 의미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나와 다른 생각에 반론을 제기할 필요없다. 새까맣게 덧칠해버린면 된다. 즉,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그걸 다름 아닌 나 스스로 해내면 그만이다. 펑크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DIY 정신.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라. 파괴가 아니다. 창조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