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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제 정신의 끝

by 기름코 2011. 1. 20.

    난 그저 구름에 실려 두둥둥 떠가는 지구의 점 하나다.
    난 그저 구름에 실려 두둥둥 떠가는 지구의 점 하나다. 
    저 점이 언젠가 빵 터지는 것처럼 어차피 모든 인생 끝이 있고 죽음이 있다. 너무 열내며 살지 말자.



분노와 미움이 많아질 땐,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제정신의 끝'처럼
세계의 외관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는 이리 평정의 끈을 놓으려고 하는가.
순간의 불쾌함도, 돌아서고 났을 때 치미는 분노와 욕지거리도
상대가 아니라 나의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요새 내게 상처준 사람들이 떠오르고, 싫은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니, 나만 괴로운 것 같다.
지나치게 말이나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상상력이라는 새신을 신고 미래만 보았으면. 진심으로.
올해는 '화'를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던 건 이기심의 발로가 큰 원인이다.
사회생할에서 손해볼 수도 있다는 불안 하나로 악감정을 눌렀는데, 이런 식으로 넘어간 건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다시 떠오른다. 그러면 나만 힘들지.
성찰의 힘을 길러, 그 화에 대해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성숙하게 푸는 사람이 되는 것은
이제 나의 정신적 생존을 위해 필수인 일이 된 것 같다.

제 정신의 끝에 나오는 남학생이 나일 수도 있다는 건, 가상의 대입만으로도 공포다. 
 


제 정신의 끝


어느 때 한 학생이 등교 도중 언제나 만나는 여고생과 그날 따라 흘낏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틀림없이 미소를 띠운 것을 발견합니다. 때는 초여름 역전 거리의 빈약한 가로수의 녹음도 한결 푸릇푸릇해지고 아침 햇빛 속에서 그녀의 순간적 미소는 흰꽃처럼 빛납니다. 학생은 내가 그녀를 좋아하듯이 저편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하고서 그날 하루는 마냥 행복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있더라도 정신은 전연 딴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나 주소를 아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여러가지로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틀림없이 제정신입니다.)


-중략- 


사실은 싱긋 웃고 말을 거는 편이 훨씬 자연스런 방법입니다만, 용기가 없는 사나이는 언제나 부자연스런 행동을 선택하기 쉽습니다. 그는 역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녀가 역에서 나오는 모습을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흘째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 전차를 내리고 역전에서 손 흔들며 헤어지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학생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십미터 쯤 뒤를 몰래 따라갑니다. 점점 사람 왕래가 적어지므로 미행이 탄로날까봐 애가 탑니다. 마침내 흰나무 울타리를 두른 집의 작은 문으로 그녀가 들어가는 것을 알아냅니다. 문패를 보니 하야시라고 써있습니다. 학생은 흐뭇한 마음으로 귀로에 오릅니다.

(여기까지는 틀림없이 제정신입니다.)


-중략-


마침내 어느 날 그는 그녀를 일부러 지나치게 한 다음 나중에 나온 동급생인듯한 소녀에게 그녀의 이름을 묻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는 대담합니다. "어머, 저기 가는 저 애? 하야시 가스꼬예요." 하고 소녀들은 킬킬 웃기 시작하고 그는 뺑소니를 칩니다. 그의 소문이 그녀의 귀에 들어갈 것은 이제 확실하겠죠.

(여기까지는 틀림없이 제정신입니다.)



이튿날 아침 드디어 그는 이것을 실행합니다. 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자 그녀가 나옵니다. 느닷없이 단도를 들이대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흰 각봉투를 들이대자 그녀는 받긴 받지만 공포로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집안으로 뛰어들어가고 맙니다. 그는 밖에서 헛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윽고 아버지와 함께 그녀가 다시 나오고 아버지가 그에게 일갈을 합니다 .그는 머리를 싸고 달아납니다.

(여기까지는 틀림없이 제정신입니다.)


그 날은 이미 대학에 갈 마음이 나지 않습니다. '그녀도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어째서 그러한 짓을 했을까? 내성적인 학생은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일갈을 당했기 때문에 심한 쇼크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듯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 따위 짓을 하다니, 틀림없이 그녀는 내게 배신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어. 내가 달리 여자친구라도 만든 줄로만 알고 복수를 하기 위해 아버지를 시켜 혼을 내준 게 틀림 없을 거야. 좋아, 이제 이렇게 된 바에는 이 몸의 결백을 증명하는 편지를 우송해주자."  

(아! 이미 제정신의 촛불은 깜빡이고 있습니다.)


그 회답이 오지 않으므로 그는 매일 부지런히 편지를 썼고 <나는 결코 그대의 애정을 배신하고 있지 않다. 온 세계에서 사랑하고 있는 것은 그대뿐이다. 내가 빠의 여급을 정부로 삼고 있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두 사람의 사이를 이간하기위한 그대의 클라스 메이트가 퍼뜨린 전혀 근거 없는 소문에 지나지 않다> 는 등 하루 십오페이지나 되는 편지를 써댑니다.

(제정신의 촛불은 꺼져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도 답은 안 옵니다. 그는 돌연 그녀의 끈질김(?)에 화를 내고 이렇게도 그의 자유를 속박당하고 간섭당한다면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당당히 인연을 끊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때는 털어놓고 다 말해주자. <댁의 따님은 나에게 홀딱 반해서 매일 전화를 걸어와 귀찮아 죽겠으며 함부로 프레젠트를 주는 것은 좋지만 어제 같은 날은 초코리트 상자인줄 알고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쥐새끼가 백 마리나 튀어나왔다. 그래서 온 집안이 난리가 났는데 어쩔 작정이시오> 하고 따지러 가기로 하자.

(이것이 벌써 제정신의 끝입니다)


제정신이 끝나고 광기가 시작될 때 무서운 일이란 세계의 외관은 여전히 똑같게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 앞에는 담배 가게가 있고 그 담배 가게의 공중전화에는 가로수의 푸른 가지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함없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세계에서 단지 그만이 '피해를 입어'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제정신의 세계는 풀의 도약대 끝과 같은 위험한 장소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조용한 길에서, 조용한 거리의 모퉁이에서 휙- 아지랑이처럼 사리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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