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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언제까지 그럴 것 같아요?

by 기름코 2011. 1. 8.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것은 너를위해

살아,
기다리는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오.


가수 이소라는 객석에 있는 다정한 커플에게, "거기 , 언제까지 그럴 것 같아요?" 라고 물었다. 
수백명의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그리고 금방 다른 농담들의 홍수 속에 흔적도 없이 쓸려갔던,  별 대단치도 않은 짧은 농이 2년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 때의 나는, 나를 잠식한 어둠같은 현실이 이소라의 농담처럼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럴 것 같아요, 를 주문처럼 외우면서.

 

그리고 2년 뒤, 2011년의 나는, 신혼여행지를 딱 나의 속도로 느릿느릿 게으름을 부리며 알아보고 있다. 

사랑을 하고 프로포즈를 받고 상견례를 하고 식장을 잡고, 그 모든 일들이 짧다면 짧다고 할 수도 있을 시간 동안 일어났고, 이제는 그 다음 단계로서 빨리 예약할수록 좋다는 신혼여행지를 물색중이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고 있기도 한데, 나만 빼고 지인들은 모두 신혼여행에 관한 주관이 뚜렷한 것 같아 신기하다. 다들 그런 건 언제 생각해보고 살았던 걸까.

정신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문득 이런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결혼준비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유부녀가 되어있으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것만 같다는.

연애기분에 들떠, 뭣도 모르고 그냥 진행시켰던 그 모든 과정들에 대해 왜 나는 각 잡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질 않았던 걸까. 생각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아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던 우리의 관계에 대한 고마움을 내가 배은망덕하게 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유키노처럼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면 아리마로 하겠어, 라는 각오도 없이 내 인생에서 이만한 사람 또 만날 확률을 재고 재서 오늘에까지 이른 나는, 과연 그 험난하다는 결혼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와 한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즐겁다는 것이 앞으로 30년 이상을 함께 하겠다는 서약의 충분근거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이 사람 아니면 안되겠서요! 류의 확신은 아닌 걸, 이란 마음으로 서약 앞에 선다는 것이 나는 영 찝찝하다.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것도 있지만, 실제로 주변의 가까운 사례를 들자면, 스테판은 고야언니와 사귀기로 하고, 집에 전화해서 "내 인생의 여자를 만났어요." 라고 했다는데, 그 내용이 담긴 글을 읽고 나는 더 불안해졌다.

최승자의 시처럼 모든 사랑이 무참히 꺾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대단했던 사랑을 했던 이들에겐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닐까. 내 사랑이 그들보다 덜 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 남들에겐 없는 정말 특별한 스토리를 지닌 관계도 그냥 그렇게 땅 위에 있지 못하고 어느 날 꺾여 꽃병으로 가서 음미만 되는 관상용이 되어버린다면, 이건 정말 너무 슬프다.
이것이야말로 허무.

언제까지 그럴 것 같아요, 를 주문처럼 외고 있던 내가
이제는 그 주문을 두려워하고 있다.
모든 것이 결국엔 허무로 끝나버릴까봐.
남들이 다 인정해주는 특이하고 특별한 사랑도 최승희의 말대로 결국은 저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라면,
우리의 것은 어떻게 될까.


혹자는 소개팅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 한번도 못만났고, 사귄다해도 결혼까지 하는 사람 못봤다고 하는데, 어쨌든 우리는 내 기준에선 참으로 평범한 루트인 소개팅으로 만났고, 소박하게 연애했고, 드라마스런 상황 한 번 안 찍고, 양가의 적극적 찬성 아래 여기까지 오게 됐다. 여우주연상감인 내 성격과 달리, 심심할 정도로 무난했던 시간이었다. 사랑과 인연에 대해선 너무 다채로운 꿈을 꾸며 살았던 나는, 여전히 이 무난함에 적응이 안 된다. 엄청나게 특이하게 연애하고 특별하게 살 줄 알았는데, 전혀 상상도 못해보던 이 무난함이 주는 평온함에 결국 나는 굴복하고야 만다. 하지만 반골기질 충만한 나는 마지막 반항으로 아직까지 적응을 못했단 핑계로 이런 긴가민가한 글이나 올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비겁하게, 언제까지 그럴 것 같아요, 를 두려워하면서


얼마 전 나의 남자친구는 원어데이에 괜찮은 인형이 나왔는데 네가 괜찮다고 하면 하나 사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승낙을 했더니, 내가 골라놓은 것 말고 하나를 더 주문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왜 2개나 샀냐고. 
어차피 2개 샀고 여자친구가 그 내막을 모르는 상황이면 대개의 남자들은
"하나는 오불이곰 하나는 그심이곰~!" 이런다든지,
" 이 곰돌이들처럼 언제나 우린 한쌍이야!."  
"이 푸른 곰이 흰 곰을 꼭 안고 있듯이 너를 지켜주겠어!"  라고 할 텐데, 

내 남자친구는 한다는 소리가 
"하나 사나 두 개 사나 어차피 배송료는 똑같아. 이왕 배송료 드는 거 그냥 하나 더 샀어."  

대박............
절대로 비유로써 말하지 않고, 구체적인 콘크리트벽 마냥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우리 오빠님. 
무드는 없지만, 그만큼 진실되고 심하게 서민적이고, 어쨌든 지금까지는 귀엽다. 

나에게 드라마로맨스가 아니라 온갖 종류의 믿음을 선물해준 남자니까, 참 고맙고 좋은데
한 가지 정말 내가 바라고 바라는 것은
제발 나를 무참히 꺾어, 화병에 꽂진 말기를.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저 넓은 대지 위에 심어져, 절대 그 무언가를 장식하거나 추억하기 위한 관상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고 자연스럽게 변하기도 하면서,
그 시간에도 여전히 생생히 아름답게 '살아'있기를. 
 
 왜냐면 나는 최승자처럼 꺾여 분질러짐이 사랑의 끝임을 알아도 사랑하니까 그 종말을 기다려줄 정도로, 
 인생을 초월한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유치할 정도로 재미지고 기쁘게 살길 원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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