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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세바스티안 실바의 영화 <하녀>

by 기름코 2013. 4. 1.

 

 

 

3월 29일, 남편과 봄. EBS금요극장.  칠레영화.

 

1.

최고의 엔딩.

라켈이 워크맨을 귀에 꽂고 달리는 마지막 장면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떠올리자, 가슴이 벅차다.

모든 이야기를 지닌 것들은 시작과 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작과 끝이 훌륭하면, 보통의 재주꾼들도 그 가운데 여백을 얼마든지 다른 매력적인 스토리를 넣어 만들 수 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시작과 끝이 아무나 못하는 어려운 일이다.

영화 <그을린 사랑>의 처음 장면은 영화 끝에서 비로소 이해되는데, 그 순간 소름이 돋았고, 소설 <연을 좇는 아이>의 엔딩에서는 울고야 말았다. 평생을 안고갈 죄의 시작이었던 연이 이제 다시 구원의 작은 가능성으로 돌아오니까 어찌나 수미쌍관이 맞는 시작과 끝이 던지 감동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이거 좀 괜찮다 싶은 것들은 모두 훌륭한 시작과 끝을 지니고 있다.

 

 

2.

최고의 배우.

이렇게 연기 잘 하는 배우를 근래에 본 적이 없다.

고성 한번 지르지 않지만 분노가 전달되고, 통곡하지 않지만 아픔이 느껴진다.

이건 배우 덕도 있겠지만 좋은 시나리오와 연출의 덕분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제작자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텃세를 휘두르면서도 나약하고, 외롭지 않은 척 하지만 외로운,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수많은 모순을 이렇게나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3.

관계란 동등해야 한다. 사랑과 우정도 동등한 관계에서 나온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높이는 동등해야 한다. 동등하지 않으면 그것은 부부라 할 수도 없고 부모 자식이라 할 수도 없고 친구라고 할 수도 없다.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달라도, 상대와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누구와도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상류층 가족이 라켈을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측면도 물론 있지만, 오히려 더 라켈이 자신을 그렇게 동등하지 않은 입장에서 보고 있다. 왜냐, 똑같은 상황인 루시는 라켈 같지 않으니까.

 

4.

자기 본래 가족에 대해서는 얘기조차 하기 싫어하며, 20년 동안 수발 든 칠레의 다복한 상류층 가정에 스스로 한 식구로 동화되어 있다고 믿는 가정부 라켈.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남이 가진 것에 대한 동경이, 한 가족이라는 환상 아래 교묘하게 포장된다. 그리고 그것은 라켈의 두통으로 영화에서 표현된다. 라켈이 겉으로 자부심을 느끼며 말하는 이 가족에 대한 소속감은 라켈의 만성적인 두통과는 너무나도 모순적이다.

 

반면 루시는 자존감과 자기 이해가 뛰어난 사람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어도, 남의 집살이를 해도, 절대로 거기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사랑하며 자기 주도적인 삶을 놓지 않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루도 빼지 않고 하는 조깅이라는 운동으로 표현된다. 고용주에게 종속된 입주 가정부라는 위치이지만, 아무리 바빠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온전히 확보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반면, 라켈은 한달에 한번의 자유시간에조차 고용주와 똑같은 가디건을 찾아 사입는다. 자신의 업 뿐만 아니라 정신도 종속된 것처럼 보였다.

 

루시를 보니,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에서 본 구절이 생각났다.

 

"추상적인 일류의 일원이라는 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도 존재할 수 없어. 모든 사람은 지구상의 구체적 장소에서 구체적인 시간에 어떤 민족에 속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구체적인 기후 조건 아래서 그 나라 언어를 모국어로 삼아 크잖아. 어느 인간에게도 마치 대양의 한 방울처럼 바탕이 되는 문화와 언어가 스며 있어. 또 거기엔 모국의 역사가 얽혀 있고, 그런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그런 인간이 있다면 그건 종이쪽처럼 얄팍해보일 거야."

 

요네하라 마리가 서로 다른 국적의 아이들과 지내면서 겪은 내셔널리즘에서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서로 다른 사회적 계급의 사람들이 지내는 모습에서 같은 결론을 내렸다.

 

자신을 바로 이해하려면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자신이 속한 것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없는 사람은 삶이 언제나 주변부에 머문다. 그런 사람의 자아는 얄팍하다.

 

 

5.

요수카 피셔의 <나는 달린다>를 보고는, 달리기에 동경이 생겼다면

이 영화를 보고는 진심으로 나도 한번 달려보고 싶어졌다.

조깅을 해야겠다. 조.깅. 이렇게 글자를 쓰기만 해도 숨차지만 한번 달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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