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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영화 <해피이벤트>

by 기름코 2013. 5. 18.

 

 

 

프랑스니까,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임신과 육아가 한 고학력 여성에게 가져오는 정신적 혼란이 얼마나 큰지, 질이 성적기능은 완전히 소진하고 통로의 수단으로서만 기계적으로 다뤄지고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낯선 경험에 한 여성이 어떻게 피폐해지는지를, 보는 사람이 고통스러워질 정도로 그려낸다. 왜 여성이 아이를 낳은 후에, 남편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부부가 멀어지는지 드라마스러운 작위는 다 빠지고 매우 현실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두 남녀가 사랑에 빠져 바로 동거에 들어가고, 결혼같은 과정 없이 바로 임신과 출산에 이른다는 지점에서 한국과 너무나도 다른 문화를 기본으로 깔고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 출산, 육아' 쓰리콤보는 만국공통으로 여성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과 짐이다. 육아 과정에서 축복처럼 여겨지는 순간은 너무 짧고 김칫국 묻은 티셔츠 같은 시간은 백배로 훨씬 길다.

 

프랑스니까 훨씬 낫겠지 싶었는데 들여다보니까 또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왜냐? 주인공들은 평범한 경제수준의 남녀니까.

내가 볼 때 나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경제 수준이 중요한 것 같다.

국적이 프랑스, 한국 이렇게 달라도 비슷한 경제수준끼리는 삶에 공통분모가 많고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마르크스가 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했는지 알겠음.

국가는 중요하지 않아, 경제 수준과 계급이 삶과 향유하는 문화를 결정하니까.  

특히 경제력은 잉여 시간 여부를 결정하는데, 경제력이 낮을 수록 시간 확보는 적어지고 따라서 육아를 하는 여성은 자신의 경제력에 따라 지옥과 천당에 머무는 시간이 결정되는 것 같다.

 

영화 포스터는 사랑이 낳은 눈부신 기적 ~ 이렇게 홍보를 하고 있지만 이건 마치 예전에 지구를 구해라의 실패한 홍보와 맞먹어 보이는 멘트다. 영화가 말하는 핵심과 전혀 맞지 않다. 아이가 탄생하여 잠든 장면이 줌 아웃되면서 깔리는 음울한 음악을 홍보하는 사람은 못 들은 것인가. 영화 내용은 포스터처럼 햇빛햇빛거리지 않는다. 그레이그레이야.

결말은 긍정긍정으로 끝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느닷없었다. 긍정긍정 감정에 나는 도달하지 못했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철학 박사과정생인 주인공 여자가 남자 박사과정생에게 조교수자리 빼앗기고, 육아를 비롯한 자신의 삶 제반 문제들에 완전히 탈진하고서, 중얼거리는 장면이다. "나는 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헤겔, 니체 이런 사람들은 나의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라는 독백이 나온 후 자신의 형이상학적인 논문을 영구 삭제해 버리곤, 자신의 현실적 이야기와 고뇌가 담긴 해피이벤트라는 글을 밤새 써내려간다.  이런 식으로 자기 커리어를 포기하나 싶어 너무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그래 남자 철학자님들아, 그대들에게서 우리가 어떻게 현실적 위안을 얻을 수 있겠어' 라는 한탄이 나오기도 했다.  그 시대에 남자가 철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그들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하지 않은 남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시대의 찬란했던 고대 문명이 노예들의 무급 노동력에서 나온 잉여 시간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처럼.  

 

임신, 출산, 육아는 이념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달라진 시대나 선진국의 도시 문명도 여성에게 어떻게 해줄 방도가 없어 보인다. 인간도 동물처럼 유성생식하여 번식하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임신 출산만큼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것도 없다. 짐승으로 돌아가는 자연과 원시의 시간 앞에 국적초월, 시대초월, 여성은 대동단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석기 시대엔 공동 육아라도 있었고 자아실현이라는 개념도 사회에 팽배해있지 않았지만, 부자 제외 보통의 경제 수준을 가진 현대의 여성은 그렇지 않으므로, 이 과정은 여러모로 수난이다 수난. 

 

또한, 아무리 사랑하는 남녀라도 이 과정에서 서로를 너무나도 이해 못하게 된다. 남보다도 못하게 됨. 아무리 돈이 있어도 이 부분은 해결이 어렵다. 육아야 보모 쓰면 되고, 집안일은 도우미 아줌마 쓰면 되는데, 남녀의 근원적인 서로에 대한 몰이해는 점점 골이 깊어지기만 할 뿐, 해결책이 안 보인다. 그리고 양육과정에서 자기 엄마에게 상처가 많은 주인공이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모유수유와 끈에 집착하여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과 체력을 더 잡아먹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결국 별거에 들어가게 된 주인공이 주인공의 엄마에게 묻는다. 왜 아이를 낳았냐고.

엄마 왈 ,

"네 아빠를 너무 사랑했어.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일이 아이를 낳아 함께 기르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렇게 말한 어머니는 둘째가 4살일 때 결국 남편과 이혼을 하고 여지껏 혼자 살고 계신다.

 

케빈에 대하여는 안 봤는데, 그 영화까지 보면 아예 아이를 안 낳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나이 백세에 결국엔 남는 건 나 자신 뿐이란 걸 알아도, 그러한 모든 과정을 자의로 선택하고 경험하는 것 또한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엄마 왈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나를 낳고 나를 키운거라고 하심. 내가 그 말만 믿도 나도 꼭 애 낳아야지! 했는데, 정말 요즘은 낳고 싶질 않아. 아들이면 더욱더 낳고 싶지 않아. 하지만 딸이면 내 사랑하는 자식이 이 힘든 여자로서의 삶을 또 살아내야 하잖아, 그것도 슬프다. 이 모든 나의 고뇌를 오불에게 전혀 이해받을 수 없다는 점도 나를 너무나 괴롭게 하기 때문에 더더욱 앞으로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있다. 애는 태어나면 저절로 길러진다며 속 편한 소리하는 우리 엄마나, 병원도 안 가고 집에서 혼자 아무 도움 없이 애 셋을 쑴풍 낳고 너무 쉽게 길렀다는 시엄마의 몰이해 속에서 나 홀로 고군분투하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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