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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요네하라 마리

by 기름코 2013. 2. 25.

나는 요즘 김중혁의 <뭐라도 되겠지>를 읽는 중이다. 작년 이맘때쯤 하나에게 선물받은 책인데, 잘 모르는 저자의 산문은 영 당기지가 않아 책장 한 켠에 두고 미루고만 있었다. 산문이나 에세이는 일종의 남이 읽으라고 일부러 펴둔 신경써서 쓴 일기같은 거라고 생각해와서, 저자가 친숙하지 않으면 별로 궁금하지가 않다. 그렇게 한 동안 잊고 있다가, 우연히 다시 이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김중혁씨의 유머코드는 나와 65% 정도 맞는다. 빵 터지는 부분도 있지만 어떤 건 도무지 웃기지가 않는다. 그는 버라이어티 프로에 환장하고 주성치 영화에 지나치게 포복절도하며 쓰러진다는 점에서 나와 100%는 아니다. 단, 이 분의 인생에 대한 편한 자세 (책 제목 자체가 뭐라도 되겠다! 가 아니라 뭐라도 되겠지~ 다. ㅋㅋ)와 신선한 발상 (재치가 넘친다) 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잠재우고 상대의 이야기에 저절로 집중하게 만든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여러 작가나 인물들의 일화가 에피소드마다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김중혁은 아주 훌륭한 중매쟁이다. 이 사람 옆에 있으면 계속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 익숙한 하루키나 스티븐 킹도 나오고 생소한 이름도 여럿 나오는데, 그 생소한 것들 중에 한 이름이 요네하라 마리였다. 김중혁은 엉뚱한 발명이나 발상을 즐기는 사람인데,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인정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요네하라 마리. 김중혁의 소개를 통해 그 분에 대한 흥미가 생겼으나, 역시 또 내가 언제나 그러하듯이 잊고 있었다. 최근에 책을 대량 구입하면서도 아예 생각이 안 났다.  

 

그러다가 내가 바로 어제!!!!!! 24일 정월대보름에!!

그 요네하리 마리 여사를 우연히 만났다는 거 아니겠는가!!

바로 헤이리에서!!!

 

어제 운전 연습도 할겸 은_필이네와 커플데이트도 할겸 헤이리에 갔다. 헤이리에 가면 반드시 가는 곳은 한길사 북하우스. 언제나처럼 정신없이 책을 들춰보고 가격 비교하고 하면서 신나하고 있는데, 어떤 책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바로 요고~ 요네하라 마리와 4마리 고양이+ 두 마리 개와의 실제 생활 이야기다.

 

아아닛! 요네하리 마리에다가 고양이라니!! 저자의 동물과의 동거기가 너무너무 궁금해졌다.  몇 장 휘리릭 넘기기만 했는데 감이 딱 왔다. 이것은 재미있는 책이다!! 사야만 하는 책이다!!  나는 동물소재 책을 <솔로몬의 반지>와 <나비가 있는 세상> 말고는 산 적이 없다. 동물 나온다고 다 좋아하진 않는데, 이 책은 정말 느낌이 딱 왔다! 나의 감을 믿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구매. 은_필이네를 기다리면서 1층 로비에서 사자마자 몇 장 읽어내려가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몇 번 빵빵 터져서 신나게 남편에게 설명해줬다. 남편도 빙그레 웃음ㅋㅋ. 집에 와서 목욕하면서도 계속 읽다가 오늘 낮에 다 끝내버렸다. 마지막엔 결국 울어버렸다. 

 

러시아어 동시통역가이자 나는 그 동안 몰랐지만 알고 보니 일본의 인기 작가였던 요네하라 마리는 1950년 생인데 2006년에 난소암으로 돌아가셨다. 대학시절 읽었던 전혜린이 비록 우울하지만 옛날에 태어난 사람같지 않은 놀라운 감각을 선보였다면, 요네하리 마리도 50년대 생 일본 여자같지 않은 생에 대한 주관과 재치가 보인다. 왜 이런 재주꾼들은 세상을 일찍 뜨는가.  요네하리 마리의 번역된 책 전부를 다 사서 읽는 게 나의 올해 독서 목표가 되었다. 이제야 이 분을 안 게 너무나 아쉬울 정도다.

 

작가의 유머감각은 나와 100% 코드가 맞는다. 요네하리가 지인들에게 보냈던 연하장부터 보자.

 

재작년의 고양이 두 마리에 이어 작년에는 출장지에서 집 없는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인생을 자꾸만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 1992년

 

봄바람 보내드립니다. 바람 속에 고양이털 듬뿍, 사람털은 조금, 그리고 불그죽죽한 개털은 2-3개 섞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 1997년

 

난 이런 센스가 정말 너무너무너무 좋다.

 

연하장을 받자마자 연초부터 득달같이 전화해서 일갈한  은사님의 답변도 웃기다.

 

자네는 그보다 빨리 인간 수컷을 키우도록 노력하게! 인간 수컷 말이네!

 

왜 제목을 인간 수컷은 필요없어 라고 지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ㅋㅋㅋ

 

요네하라 마리는 또한 굉장히 섬세한 관찰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도리와 무리의 이름을 짓는 것도 그런 관찰력이 없다면 불가능했다고 본다. 동물들의 생태에 대한 식견이 학교에서 남에게 배워서 아는 게 아닌, 오직 자신의 노력과 지력으로 체득한 것들이라 자기만의 이야기로 설득력있게 풀어낼 줄도 안다. 동물에 얽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놓칠 수 없는 빅재미다.

 

이 책에서 나를 웃겼던 일화 한 가지만 간략히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요네하리 마리의 단골 동물병원 이야기다. 책에서는 시간적 순서가 순차적이지는 않아서 퍼즐처럼 엮어야 이 병원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이 병원은 작가가 다닌 그 시기에만에도 이름을 네 번이나 바꿨다. 한번은 아라카와 애완 클리닉에서 '노아 동물의료센터'로 바꿨는데, 요네하라 마리가 여기에 대해 쓴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보겠다. 

 

노아라는 이름에는 노아의 방주에 탔던 동물들의 치료는 모두 맡겠다는 아라카와 선생님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점은 전단에 특별히 강조되어 있었다.

 

쥐에서 코끼리까지.

-24시간 진료

-왕진, 마중 시스템

-애완동물 호텔 완비

-병원견학 수시 가능

 

-중략-

 

이를 위해 저희 센터 직원들은 고도의 의료기술 습득에 매진함과 동시에 인간의 따뜻함도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 노아 동물의료센터 대표 아라카와 다카시 및 직원 일동

 

쥐는 그렇다쳐도 코끼리가 오면 어떻게 할까. 일방통행 길가에 있는 센터는 총면적이 8평, 대기실이 1.5평, 치료실과 수수실이 합쳐 5평, 호텔이 1.5평 정도다. '견학'은 순식간에 끝난다. 그리고 직원 일동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라카와 선생님 의외의 직원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본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진지진지 열매를 먹고 비장했던 수의사 아저씨는 나중에 병원 이름을 또 바꾼다. 또 다시 달라진 병원 간판을 보고, 요네하라 마리가 왜 바꿨냐고 묻자 수의사의 아저씨의 대답.  "아내가 페인트칠을 좋아하거든요!"

 

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의사양반 ㅋㅋㅋ 이게 무슨 소리요 ㅋㅋㅋ

나도 이런 동물병원에 단골 삼아 자주 다니고 싶다. 우리나라는 이런 병원이 없는 건지 내가 아직 발견을 못한 것인지.

보통은 매출 때문에 본래의 인지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름 잘 안 바꾸는 게 상식인데, 이 수의사 분은 기본적으로 생각이 자유롭다. 나는 이런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

 

요네하라 마리는 훌륭한 통찰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고양이 똥을 매일 치우는 일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그리스 신화와 료안지의 석정에서 그 일상이 주는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약간 편집해서 소개해본다.

 

저녁에도 거의 같은 일이 반복된다. 아침에 깨끗하게 해둔 화장실이 거짓말처럼 온통 더러워진 모습을 보이면 종종 허무해지고 가끔은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피곤하거나 급한 일로 서두르고 있을 때에는 조급해진다. 이 일은 시시포스의 무한 지옥과 비슷하다. 영원히 계속되는 허무한 일. 이 만큼 절망적인 운명은 없다.

 

너무 호들갑을 떨었나. 배설물 처리는 전혀 무의미한 행위는 아니었으니까. 깨끗해지면 기분도 상쾌해지는 일이다. 마음 속으로 일종의 체념같은 것이 들기 시작했을 때 하나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계기는 NHK 프로그램이었다. 다도 종가의 하루를 정성 들여 담담히 전하는 다큐였는데 일본의 미의식의 본질을 부각시키는 눈이 씻기는 듯한 영상이었다. 수제자가 매일 아침 일과로 다실의 화로 재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 모습이 내가 고양이용 화장실 모래 표면을 정돈하는 모습과 겹쳤다.

 

이후 고양이용 화장실의 청소는 잡일에서 신성한 의식으로 승격했다. 작업에 집중하는 동안 마음을 지배하는 평온함이 좋았다. 좌선으로 정서적 안정을 되찾는 일과 비슷하다.

일곱 마리의 고양이와 사는 아야코씨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했다.

 

"어머나 세상에, 너무 좋아라. 나는 료안지  마당을 청소하는 기분으로 고양이용 화장실을 손질해요."

 

메마른 산수를 바라봄으로써 인간은 돌과 모래가 상징하는 영원 앞에 덧없는 자신을 깨닫는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상관이라고 한다. 나는 모래 표면을 정돈하며 아메바에서 사람에 이르기까지 생물의 본질은 섭취와 배설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확인한다. 배설물이 끊이지 않는 일이야 말로 살아있다는 증거구나, 라고.

 

이쯤 되면 정신승리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글쓴이처럼 도무지 고양이 똥 치우는 일을 고차원적으로 승격하진 못하겠지만, 일본에서 보고 온 료안지 석정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 석정을 보면서 정원 자체보다는 이걸 유지하는 노력과 행위 자체가 이미 정신수양을 요구하는 일이라며 저 의미없는 빗질을 왜 자꾸 매일 하고 앉았냐, 라고 성질 냈는데 저런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을 줄이야!

 

겐이라는 개의 에피소드는 뭉클하다. 안 짖던 개가 갑자기 짖는 이유가 나오는데, 뭉클.

잘 모르는 사람은 얘가 왜 이렇게 사나워졌나 싶겠지만 수의사가 설명해준 이유는 감동적이면서 짠~했다.

 

"겐은 말이죠, 마리씨, 지금까지 자제하고 있던 거예요. 이전 주인에게 버림받아서 마리 씨네로 가게 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거예요. 마리씨 집은 어디까지나 임시 거처였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붙임성있게 대했던 거죠. 그런데 이제 마리씨 집을 마지막 거처로 정한 거예요. 그래서 이 집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자각이 싹 튼 거죠. 틀림없어요."

 

이렇게 내게 개에 대한 놀라움과 감동을 준 겐의 엔딩은 너무 슬프다. 혹시라도 책을 볼 사람도 있으니 스포는 안하겠음.

 

이쯤에서 작가 사진 투척. 미인이심. 그 시절 잘나가는 전문직 독신 여성임.

 

아아, 나는 돌아가신 여인분과 사랑에 빠지었다. 저는 요네하라 마리 홀릭입니다.

앞으로 만나는 친구 및 지인들에게 나는 그녀를 전도(?) 하고 다닐 작정이다.  

하루키가 100%의 여자아이에 대해 썼지. 나의 100%의 작가는 당분간 요네하라 마리다.

그 날카로움과 위트! 아아  2013년은 그녀 덕에 즐거울 것 같다. 인생의 맛이다, 이런 게.

내년에도 이러한 발견이 또 있겠지. 계속 건강하게 잘 살아내야겠다.

 

 

 덧, 검색 중에 발견한 고종석의 한국일보 글. <요네하라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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