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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영화 족구왕

by 기름코 2015. 1. 18.

 

 

 

삼포세대 청춘을 위로하는 매우 유머러스하고 덜 꼰대스러운 영화다.

중간중간 너무 노골적인 비유, 대책없는 낙천만 빼면 아주 괜찮았다.

 

외제차 몰고 다니며 있는 척 하지만 실은 허름한 고시원해서 살고 있는 얼짱남 A

간지도 안 나고 쓸모도 없는 족구를 사수하려는 주인공에게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하라는 B

연애라는 단 하나의 목적만으로 다시마만 먹고 살을 무지막지 뺀 주인공 절친 C 

대학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부문에서 비주류일게 분명한 뚱뚱보 여인 D 그러나 할 것 다 해내며 존재감을 뽐내는 D

패션쇼하러 학교 오는 것 같지만 은근히 양심있고 생각 있는, 공부해서 서울대 가는 게 꿈이라는 얼짱녀 E

제대하고도 해병대부심을 부리며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마초남 F그룹

공부와 미래에 방해되는 족구장 따위 다 없애버려야한다는 B의 전여친 G

요새 보기 힘든 바른 청년이지만 얼굴만 반반하고 싸가지는 없는 얼짱녀를 좋아하는 주인공

취업률과 학교 성과에만 급급한 사립학교 특유의 이사장 라인과

학교랑 사회가 이렇게 된 건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안 하는 니들 이십대 때문이라고 일갈하는 총장

 

짧은 영화에 이렇게 많은 캐릭터들이 입체적으로 보이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각본의 재능이기도 하지만 대학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저절로 이해가 되고 수긍이 가는 인물들이 많아서일 듯.

 

대통령도 장관도 아닌 대기업에 들어가고 7,9급 공무원 되는 게 꿈꿀 수 있는 안정 범위인 애매한 대학에 다니는 그들은 그닥 다양하지 않은 선택지 앞에서 애매하게 시간을 부유하고 있다. 한심해 보일 수 있는 인물을 한심하지 않게,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족구를 시간 낭비가 아닌 상황으로 설득력있게 끌어가는 게 족구왕 스토리의 핵심인데 영화는 그 단순한 얘기를 완전히 직구로 던지고 있어서 다소 촌스럽다. 하지만, 캐릭터들이 워낙 살아있고 중간중간 유머와 재치들이 숨어있어서 그 직구를 웃으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 족구왕의 뛰어난 점은 메시지 자체보다는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일본에 스윙걸즈, 우드잡의 야구치 시노부 감독이 있다면 한국엔 우문기 감독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주인공과 절친C가 팩을 차며 잉여로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잊지 못할 것 같다.

바로 그 장면에

사범대 페다에서 다같이 잉여롭게 커피우유 팩을 팡팡 차며 낄낄댔던

내가 있고 우리가 있었던 듯.

 

어느 날 문득 나이 앞자리 3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지나간 이십대를 뭐하면서 보냈는지 허망했다면,

이 족구왕을 한번 보시라고 감히 추천해본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내가 원해서 하는 것들로만 가득찼었던 그 시간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