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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한강의 '흰'

by 기름코 2017. 6. 21.

끝장을 덮자마자 아! 탄성이 나왔다. 내게 올해 최고의 소설은 한강의 '흰' 이 될 것 같다. 시집같은 크기와 두께가 부담없어 보여 도서관에서 집어들었는데, 와 대박이다.

 

일단 형식이 독보적이다. 난 이런 구성의 소설을 지금까지 본 적 없다. 흰 색을 중심에 두고 흰 것과 관련된 이미지들 예를 들어 강보, 배내옷, 진눈깨비 등을 끄집어 낸 뒤 각각에 살을 붙여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데, 각각은 독립적인 산문시 같으면서도 서사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문장 또한 독보적이다. 바사삭 쉽게 깨먹지 않고 혀로 굴려 천천히 음미하며 녹여먹고 싶은 문장들. 뺄 말도 더할 말도 없는 문장을 보고있노라니 정갈하고 깨끗한 방이 연상됐다. 같은 모국어를 쓰는데도 언어 구사의 수준이 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가 이렇게 담백하고 깊은 맛이 있는 언어라니. 한강의 '흰'에서는 추상적이고 압축적인 시적인 문장이 맥락을 만나며 눈물을 자아내는 서사로 돌변하는데, 그 솜씨가 신묘할 정도다.

 

+

 

<진눈깨비>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