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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건전지

책, 책, 책

by 기름코 2015. 8. 4.

- 한겨레 이재성씨 글

 

 

1.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집 <보다>에서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고 시간을 사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언급한 뒤, 최근 미국 뉴욕에서 유행한다는 ‘폰 스택’(Phone Stack)이라는 게임을 소개한다. 식당에 모여 식사할 때 각자의 휴대전화를 한가운데 쌓아놓고는 먼저 폰에 손대는 사람이 밥값을 내는 것이다. 좋게 보면 스마트폰 말고 대화에 집중하자는 취지일 수 있지만, 이건 일종의 파워게임이라고 김영하는 말한다. 휴대전화가 울려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이른바 ‘갑’일 확률이 높다. 사회적 위치가 곤궁할수록 휴대전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스티브 잡스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더 나쁜 방향으로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 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부자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에게 직접 시간 쿠폰을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이런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지킬 것인가.”

 

김영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책읽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 또한 시간을 앗아가는 미디어지만, 독서는 시간과 지혜 또는 통찰을 맞바꾸는 교환 행위다. 무엇보다 책읽기는 가장 적극적인 정신활동이며 가장 고급한 미디어 소비 행위다.

책은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다양한 디자인을 경험할 수 있는 훌륭한 가구이기도 하다. 거실에 책을 꽂아놓고 제목만 보는 것도 일종의 독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나의 개똥철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사람이 일본의 진보적 사상가 가토 슈이치(1919~2008)다. 그는 ‘읽는 법’보다 ‘읽지 않는 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우충동(汗牛充棟·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내고 집 안에 쌓으면 대들보에 닿을 만큼 책을 많이 수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책이 많은 장서가도 그 많은 책을 다 읽지는 못한다. 읽지 않았더라도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 줄만 제대로 알면 필요할 때 언제든 꺼내 읽게 된다.

 

가토 슈이치의 <독서만능>이라는 책은 1962년에 나온 것이지만 지금 봐도 전복적인 주장이 많다. 가령 독서하기 가장 좋은 공간은 침대이며, 가장 좋은 자세는 누워서 보는 것이라는 주장이 그렇다. 평소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던 나는 일말의 죄책감(책에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같은 게 없지 않았는데 가토 슈이치의 말에 큰 위안을 얻었다. 그는 책을 읽다 잠이 드는 걸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심지어 독서가 잠자기와 비슷하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지금도 대형 도서관의 조용한 열람실에 가보라. 거기 있는 사람들은 태반은 책을 읽고 태반은 자고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독서와 수면의 밀접한 관계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금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아예 잠자리에서 책을 읽는 것이 안성맞춤 아닐까?”

 

2.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쁜가.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많은 일을 손쉽게 더 빨리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리는 왜 더 바빠졌는가.

 

80살의 영국 마르크스주의자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본이 우리를 돈의 노예로 만들고, 더 많은 것을 쓰고 버리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노동자 다수는 갈수록 과시적 소비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면서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소득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미친 듯이 찾아다니고 있다.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인위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이들은 과도한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기술 덕분에 충분히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지만 사람들의 노동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자신의 전공인 지리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공간의 정치경제학을 개척한 세계적 비판 지성인 하비의 <자본의 17가지 모순>은 신자유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자본 그 자체의 속성과 본질을 파고드는 보기 드문 저작이다.

 

하비는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좌파다. 예를 들어 그는 기존 좌파들이 공장 노동자들의 작업장이나 노동시장에서의 투쟁에 집중하느라 더 중요하고 커다란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소득의 약 3분의 1을 주택에 지출한다. (…) 노동이 아무리 노동시장과 생산의 지점에서 전투에서 승리하여 임금에 대한 상당한 권리를 획득하더라도, 이 성과의 대부분을 주택을 구입하는 데 다 쏟아부어야 할 수도 있다. (…) 사용가치로서 노동이 생산 영역에서 획득한 것을 지주, 상인(가령 전화회사), 은행(가령 신용카드), 변호사와 거간꾼들에게 다시 빼앗기고, 그 나머지 중 큰 덩어리는 세무 당국에게 가게 되는 것이다.”

 

하비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경제학 개념을 제시하면서, 사용가치를 중심으로 경제체제를 새로 짜야 한다고 역설한다. “생산을 위한 생산이라는 쳇바퀴를 돌려 조증에 걸린 듯 들뜨고 소외된 소비주의라는 강압의 세계를 유지하는 대신, 만인이 적절한 물질적 생활수준에 이르는 데 필요한 사용가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생산을 합리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잉여가치의) 실현은 필요 중심의 수요로 전환되고 생산은 여기에 대응하는 형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더불어 부동산 권력을 해체하고, 불로소득계급의 능력을 억제할 것, “(국제통화기금처럼) 미국의 달러 제국주의를 지원하기 위한 (…) 모든 국제화폐기관들을 해체”할 것 등 혁명 과제를 쏟아낸다.

 

다시 ‘시간’으로 돌아오자. 무엇보다 자본은 노동자들이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싫어한다고 하비는 말한다. “소비를 도와주는 (전자 은행업무와 신용카드, 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자레인지, 세탁건조기, 진공청소기 등과 같은) 노동·시간 절감 기술의 은총을 입어 생산의 노역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결사와 자기 창조에 능한 개인들이 비자본주의적 대안 세상을 건설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는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자, 이제부터 자본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해보자. 소비를 줄이고, 책을 읽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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